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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Jun 24. 2023

조선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비는?

말 한마디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 서오릉의 홍릉에 잠들다

조선왕비 들 중 가장 불행한 왕비 세 명을 꼽아봤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느 왕비가 가장 불행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공통점은 세 왕비 모두 자녀가 없다.    


먼저 정순왕후 송 씨다. 1454년(단종 2) 15살이 되던 해, 한 살 어린 단종과 혼인해 중전이 됐으나 1년 여 만에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면서 대비가 되었고 이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1457년 영월로 유배를 떠나면서 남편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단종과 함께 산지는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영도교에서 이별한 후 4개 월 만에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8세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되어 길고 긴 날을 눈물로 지내다 1521년 82세의 나이에 세상과 작별했다. 단종보다 64년을 더 살았는데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청룡사(옛 이름은 정업원)에서 생활하며 자줏빛 물감을 들이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흐느꼈다고 한다. 아버지 송현수도 죽임 당하고 식구들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경기도 남양주 사릉에 묻혀있다.

 



다음은 7일의 왕비로 알려진 단경왕후 신 씨다. (1487년~1557년)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왕이 된 남편인 조선의 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다. 중종반정 때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거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박원종 등 반정추진파에 의해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살해당했다. 또한 반정 주역들은 왕비를 폐위하라고 중종을 압박했고 결국 중종은 7일 만에 그녀를 내쫓았다. 이때 나이 20세였다. 그 후 단경왕후 신 씨는 71세로 사망할 때까지 인왕산 기슭에서 살면서 경복궁 쪽을 바라보며 다홍치마를 걸어두고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인왕산 치마바위라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신하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왕비를 폐위시켰다고 하지만 훗날 복위시키자는 요청이 몇 차례 나왔는데도 중종은 그러지 않았다. 중종은 두 번째 계비 장경왕후에게서 인종을, 세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에게서 훗날의 명종을 낳고 그 외 9명의 후궁을 통해 20명의 자녀를 낳으며 살았다. 이 모든 것을 단경왕후는 바로 옆에 살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들으며 눈물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단경왕후 신 씨는 경기도 양주 온릉에 홀로 잠들어 있다.

    



다음은 정성왕후 서 씨다. 조선에서 가장 오랜 기간 왕비자리에 있었다. 무려 33년이나. 조선의 제21대 영조가 왕자였을 때 혼례를 한 후부터 영조가 왕이 된 후를 합해 무려 53년간 함께 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왕비의 자리에 있었는데 어떻게 조선에서 가장 불행한 왕비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을까?     


1692년생(숙종 18)인 정성왕후는 13살 때 두 살 아래인 연잉군(후의 영조)과 혼인했다. 당시에는 궁궐 밖에서 살았으나(후에 창의궁)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세자빈에 올랐고 궁궐생활을 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경종에 이어 1724년 8월 연잉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자녀가 없었고 사이가 무척 나빴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부부 사이가 나빴던 이유로 ‘첫날밤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철없던 13살과 11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첫날밤에 손이 무척 곱다는 연잉군의 말에 정성왕후는 ‘반가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언뜻 보면 별 말 같지 않지만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 출신으로 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연잉군에게는 이 말이 어머니 숙빈 최 씨를 무시하는 말로 비수처럼 꽂혔다.


 ‘감히 내 어머니를 무시해?’


말 한마디 잘못하는 바람에 정성왕후는 첫날밤에 소박을 맞고, 궁에서 비록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조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살아왔다.

    

영조실록에 의하면(영조 28년 1752년. 11.23) 정성왕후가 회갑을 맞아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고, 1757년 정성왕후 사망 직전 심하게 각혈하고 팔다리가 심히 부었음에도 눈도 끔쩍하지 않고, 심지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빈소를 지킬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며 마침 같은 날 사망한 사위(화완옹주의 남편)의 문상을 갔다고 전한다. 정말 막장도 이런 막장 남편이 있을까? 궁중예법에도 어긋나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지나친 처사라며 대신들도 경악하며 반대했지만 오히려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관직박탈까지 해버렸다. (영조실록 33년 2월 15일 기사)


이처럼 정성왕후는 남편 영조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으며 50여 년 부부의 연을 맺어 왔다. 또한 그녀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 씨 소생의 사도세자를 매우 아꼈고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1757년 3월 23일(영조 33) 향년 66세로 사망하게 된다.  

서오릉의 홍릉(왼편의 비어있는 왕의 자리로 정성왕후가 더욱 외롭게 보인다.)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능지를 정한 후 그 옆자리는 자신이 묻히겠노라고 비워놓았는데 그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영조는 제2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구리 동구릉 내 원릉에 묻혀있고 정성왕후는 홀로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내 홍릉에 잠들어 있다. 죽어서까지 외롭게 홀로 묻혀 있는 것이다. 옆자리를 비워둔 채. 원래는 석물의 배치도 쌍릉 형식으로 조성되고 비각안의 표석도 쌍릉의 형식을 생각하며 글을 새겼는데 안타깝게도 단릉으로 되어 있다. 살아있을 때 철저히 외면해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였을까? 죽은 후 영조는 왕후의 행장을 이렇게 적었다.     


‘왕궁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최 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비석에도 왕의 이름이 비어있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부인을 어떻게 그리도 오랜 기간 철저히 외면하고 미워할 수 있었을까? 지옥이 따로 없었을것 같다. 겉으로는 웃는 얼굴이지만 그 속은 타들어갔을 정성왕후를 생각하면 정말로 영조임금이 너무나도 미워진다.      


며칠 전 함께 궁궐지킴이 실습 중인 동기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선의 왕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꿰고 있는 왕비박사에게 물어보았다.    

  

 “조선의 왕비들 중에 어느 분이 제일 불행한 여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변했다.     


“저는 영조 비 정성왕후라고 생각해요.”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지도 않았고 33년간 왕비로 있었으니 혹자는 노비로 전락한 단종비 정순왕후보다는 낮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으로부터 철저히 외면과 냉대를 받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왔을 그 긴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옆에 앉은 다른 동기생이 이어서 하는 말!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과 사랑했던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을 것이고, 단경왕후 신씨는 내쳐진 신세라서 포기하고 살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성왕후 서씨는 같은 궁궐안에서 대놓고 무시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했을까 싶네요. 체면을 중시했던 시대였고, 구중궁궐에서 여인들의 뒷말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콤플렉스 가진 사람과 지내는게 제일 힘들거든요."


"저는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왕비가 아닌 공주로 살고 싶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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