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디맑은 서강이 휘감아 돌고 관광객을 태운 나룻배가 한가로이 오가는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산수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 만큼 천하명승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이곳은 바로 지금으로부터 566년 전, 권력욕의 희생자가 된 어린 왕 단종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유배지였다.
영월 청령포 전경
모든 일은 단종의 아버지,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임금이라는 정통성, 학문을 가까이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선량한 성품, 그리고 아버지 세종 곁에서 30년에 걸쳐 쌓아 온 국정 경험까지... 세종 시즌2를 열 것으로 기대됐던 문종이 보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살 아들 단종은 곧바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제6대 왕에 즉위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소임을 다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어린 임금이 기댈만한 왕실 어른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자마자 사망했고 5년 후에는 할머니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 4년 후에는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그리고 2년 후에는 아버지 문종까지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서는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할 경우 장성할 때까지 관례적으로 왕실 어른이 수렴청정으로 버팀목 역할을 해주지만 단종은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반면에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숙부들은 30대 중반의 수양대군부터 10대 후반의 영응대군까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해서인지 문종은 눈을 감으면서 핵심 대신들에게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문종의 유지를 받은 고명대신들이다. 그래서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고명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이때 나온 말이 ‘황표정사’(黃標政事). 즉 신하를 어떤 직책에 임명할 때 김종서 등이 후보자 중 한 명의 이름에 황색 표시를 해서 임금에게 결재를 올리면 그대로 재가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고명대신들이 조정의 실질적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 가장 불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수양대군! 야심과 리더십을 겸비한 수양대군은 단종과 고명대신들에게는 위험인물이었다. 세종 때부터 정사에 참여하며 국정 경험을 쌓았고 특유의 보스 기질로 장안의 건달부터 한명회 같은 책략가, 정인지, 신숙주 같은 관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단종의 숙부들 중 수양대군의 라이벌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수양의 바로 아래동생 안평대군이다. 안평대군은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어,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도 이름을 날렸다. 고명대신들은 왕위를 넘볼 위험인물인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고... 대세가 수양에게 녹록지 않게 흘러갈 즈음에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실세 대신 그룹을 죽이고 동생 안평대군을 유배 보낸 후 며칠 만에 죽였다.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임금으로 만들려 했다고 역모 혐의를 씌운 것이다. 이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단숨에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제 단종으로서는 수양대군이 자신을 해치지 않기만을 바라는 상황... 하지만 형세는 불안하게 흘러갔다. 급기야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아기 때 단종을 양육해 준 세종의 후궁 혜빈 양 씨와 그녀의 아들 등 단종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역모 혐의가 또 씌워졌다. 이러다가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상황... 결국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넘기고 내려온다.
상왕이 된 단종은 창덕궁에서 산 듯 죽은 듯 지내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된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난다. 훗날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성삼문, 박팽년 등이 거사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밀고자가 생겨 발각되고 만다.
단종을 내치라는 신하들의 요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단종의 장인이 연루된 미심쩍은 역모 사건이 또 터지고.. 세조는 단종을 상왕에서 폐하고 노산군으로 강등해 영월로 유배 보낸다. 단종이 영월에서 유배 중에, 이미 역모 혐의로 순흥부(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유배 중이던 숙부 금성대군이 군사를 모아 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된다.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그날 단종도 세상을 떠났는데...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청령포 단종어사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이를 듣고(금성대군과 장인의 죽음을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 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처음 유배지 청령포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영월읍 내 관풍헌에서 아직 어린 소년티가 남아 있던 단종은 영월에 유배 온 지 4개월 만에 17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청령포를 둘러싼 서강에서 홍수가 나 유배 2개월 만에 당시 영월 관청이던 이곳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관풍헌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4년에 걸쳐 시시각각 어린 조카의 목을 향해 칼날을 겨눠왔고 초겨울 스산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다. 실록에는 단종의 죽음이 자살로 단 한 문장으로 기술돼 있지만 야사를 모아놓은 연려실기술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가서 감히 말을 못 하고 마당에 엎드려 있는데.. 하인 한 명이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좌석 뒤 창문으로 잡아당기니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청령포가 내려다보이는 강가에는 이 야사 속 금부도사가 지었다는 시조가 시비에 새겨져 있다.
“천 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구나”
왕방연 시조비
단종의 정확한 최후의 모습이 확인된 건 없지만 세조에 의해 타살된 것만은 분명하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나라에서, 그것도 정당하게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폭정이나 실정을 한 것도 없는데 그 친족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일어난 두 차례의 반정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상흔을 조선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