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투스칸①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현직 기자가 매주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누군가 '이탈리아 와인 중 가장 유명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실건가요? '검은 수탉'의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의 왕'이라 불리는 바롤로? 이탈리아에는 다양한 품종으로 빚어낸 와인들이 존재합니다. 와인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시킬만큼 와인에 진심이었던 그리스인들조차 '와인의 땅(에노크라이 테르스)'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러워했던 곳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요. 이탈리아 와인협회(Unione Italiana Vini)에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재배되는 양조용 포도가 토착 품종만 2000종 이상이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와인에 관한 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이 와인을 대표 와인 중 하나로 꼽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최근 몇십년 동안 가장 핫한 와인을 꼽자면 빠지지 않는 녀석, 바로 '수퍼투스칸' 입니다. 이름에 '대단히, 특별한'이라는 의미의 '수퍼'가 들어가는 와인, 수퍼투스칸은 이탈리아의 자부심이자, 자부심을 산산히 깨뜨린 재밌는 와인입니다. 오늘은 이름만큼 재밌고 맛있는 수퍼투스칸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구 문명을 찬란히 꽃 피웠던 위대한 조상 고대 로마인들의 후손이니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이 부러워했던 떼루아(포도 생장에 영향을 주는 토양, 기후 등 조건의 총칭)를 가진 만큼 와인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넘칩니다. 자신들이 유럽에 와인 문화를 퍼뜨린 와인의 종주국이라고 생각하죠. 실제로 고대 로마는 왕국과 공화국, 제국을 거치면서 유럽 전역에 영토가 닿는 가장 큰 나라였고, 대부분 유럽의 나라들은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니, 와인에 관해서도 분명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이러한 자부심이 와인에는 어떻게 발현됐을까요? 바로 '전통'과 '인증'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앞서 키안티 클라시코 이야기에서 키안티는 지역, 클라시코는 그 중에서도 더 전통적인 지역을 나눈 용어라고 얘기했었는데요. 이러한 전통이 와인의 양조 과정과 품질을 인증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의 이탈리아 와인을 크게 법정 등급으로 나눈다면 D.O.C.G(상급·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와 D.O.C(중급·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IGT(하급·Indicazione Geografica Tipica), VdT(최하급·Vino da Tavola·Table Wines)로 나뉘는데요. 이렇게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해당 지역에 허용된 포도를 사용해 전통 방식으로 양조해야 한다'였습니다. 예를 들어 토스카나 '키안티 클라시코'라면 산지오베제, 카나이올로,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쉬라를 사용해서 양조해야지만 D.O.C 등급 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고대부터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 기호가 언제나 한결 같을 수는 없다보니 전통의 방식대로 양조된 와인이 '과연 맛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거죠. 실제로 프랑스의 보르도 블랜드처럼 다양한 품종을 섞어 양조한 와인이 몇몇 단일 품종 와인을 제외하곤 훨씬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기도 하고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통만을 따르도록 만들어놓은 D.O.C.G 등급 체계가 서서히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합니다. 와인의 품질이 평범해도 전통방식을 엄수했다면 높은 등급을, 품질이 뛰어나도 전통 방법과 정해진 품종을 엄수하지 못했다면 하급을 받는 괴리가 생기게 된 겁니다. 그런데도 이 콧대 높은 이탈리아인들은 전통 방식을 고수합니다. 등급은 높고 가격은 비싼데 대부분의 대중들은 맛있다고 느끼지 않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이탈리아 와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져갔습니다.
수퍼투스칸 와인은 이런 현실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1960년대 젊고 야심있는 이탈리아의 양조자 몇 명이 나라에서 인정해주는 D.O.C.G 등급을 과감히 포기하고 VdT 등급을 받더라도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 맛있는 와인, 대중적인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이견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테누타 산 귀도(Tenuta san guido)'의 마르께시 인시자 델라 로체타(Marchesi Incisa della Rocchetta) 후작이 만든 사시까이아(Sassicaia)를 수퍼투스칸 와인의 시작으로 꼽습니다. 후작은 청년 시절부터 유럽 사교계에서 다양한 와인, 특히 프랑스의 고급 와인을 마셨던터라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고, 그 결과물로 프랑스 묘목을 받아와 이탈리아 땅에 심어서 양조에 성공했습니다. 탄생 수년 만에 사시까이아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전통적인 방법이나 품종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VdT 등급을 받습니다.
그저 재밌거나 조금 어이없는 이야기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 일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전통 와이너리가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 3대 와이너리 중 한 곳인 안티노리의 상속자인 삐에로 안티노리(Piero Antinori)가 사시까이아의 성공을 벤치마킹해 ‘티냐넬로(Tignanello)’를 내놓은 것입니다.
티냐넬로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사시까이아처럼 VdT 등급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인들의 ‘우리 전통 = 세계 최고’라는 공식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티냐넬로의 성공까지 바라본 토스카나의 전통 와이너리들도 D.O.C.G 등급에 개의치 않고 슈퍼투스칸을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등급이 품질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의 변화가 감지된 겁니다.
결국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솔라이아(Solaia), 오르넬라이아(Ornellaia), 마세토(Masseto) 등 병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와인들이 모두 이 시기 만들어졌습니다. 기존과 다른 고품질 와인에 시장은 열광했고, ‘슈퍼투스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됩니다.
슈퍼투스칸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자 1992년 이탈리아 정부는 오래전 제정됐던 기존 등급체계(고리아법·1963년)을 손봅니다. D.O.C 등급 아래에 위치한 IGT 등급은 이때 따로 추가된 등급이죠. 그리고 슈퍼투스칸이 이 등급에 들어가게 됩니다.
최근에는 고리아법이 또 한 차례 개정되면서 슈퍼투스칸 중 사시까이아가 ‘볼게리-사시까이아(Bolgheri-Sasicaia) D.O.C’라는 D.O.C 등급까지 받게 됐습니다.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왔던 전통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세계의 입맛을 사로잡은 슈퍼투스칸이 불과 50년 만에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입니다.
슈퍼투스칸은 이런 배경 때문에 와인의 역사에서 혁신의 대명사로 손꼽힙니다. 십수년 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임원들에게 새해 선물로 ‘티냐넬로’를 한 병씩 보내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졌죠.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던 이 회장은 어쩌면 티냐넬로를 선물하면서 평생 강조해온 ‘혁신’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슈퍼투스칸은 인기와 함께 가격도 점점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초기의 저명한 슈퍼투스칸들은 이제 병당 백만원을 호가하는 녀석도 흔합니다. 그런 와인은 부담스럽죠. 다음 주에는 비교적 가성비 좋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슈퍼투스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