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현직 기자가 매주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글루글루(glou glou)’라는 프랑스 단어를 아시나요? 의성어인데요. 우리 말로 치면 ‘콸콸’이나 ‘꾸르륵꾸르륵 (액체가 병·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정도로 해석됩니다.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라는 뜻을 내포한 단어죠. 이탈리아 와인을 얘기하는데 갑자기 왠 프랑스어냐고요? 슈퍼투스칸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꼽자면 대중이 쉽게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만든 음료, 바로 ‘글루글루’가 항상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슈퍼투스칸 인기의 비결 중 하나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가 꼽힌 것은 ‘이탈리아 와인은 어렵다’는 시장의 인식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했듯 토착 품종만 2000종이 넘는 ‘와인의 땅’ 이탈리아에서 양조한 와인은 항상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서왔습니다만, 현대에 들어 경쟁 와인에 비해 정돈되지 않은 표기 방식과 고집스런 순혈주의 때문에 외면받아 왔거든요.
특히 ‘키안티 클라시코’편을 통해서도 토스카나에서 주로 재배하는 ‘산지오베제(Sangiovese)’ 품종은 시큼한 느낌이 지배적일 정도로 산도가 높다고 설명해드렸는데요. 산도를 잡기 위해 오크통 숙성을 택한 키안티 클라시코에 더해, 슈퍼투스칸은 타 품종과의 블렌딩까지 추가합니다. 과실미가 진득하고 어찌보면 달달하기까지한 이른바 ‘보르도 품종’을 섞어서 산도를 낮추고 무게감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의 블렌딩은 몇 가지 이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메를로와 까베르네 소비뇽 등 보르도 품종들이 잘 자랄 수 있는 기후와 환경을 갖췄습니다. 이탈리아 중서부의 토스카나 지방, 그 중에도 해안인 볼게리 지역 등은 기후가 보르도의 해양성(Maritime) 기후와 비슷해 보르도 품종들의 무난한 생장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빈티지(포도 생산연도)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던 포도의 품질을 표준화할 수 있었습니다. 단일 품종으로 빚은 와인은 해당 연도 해당 지역의 기후에 따라 지니는 특성과 숙성 잠재력 등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와인을 더 깊게 많이 알아야 이른바 ‘망빈(망한 빈티지)’를 피할 수 있었는데, 이는 와인에 대한 대중의 접근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는데요. 포도 품종을 섞어 양조하는 방식은 이런 문제를 한번에 해결합니다. 매년 작황에 따라 품종 비율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빈티지 편차를 최소화한 겁니다.
슈퍼투스칸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와이너리들은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를 시도합니다. 현재의 슈퍼투스칸은 초기의 ‘보르도 스타일’(이탈리아땅에서 자란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블렌딩하는 형태, 사시까이아 등)에서 메를로 등 토착 품종 외 ‘단일 품종 양조’ 방식(마세토 등), 글로벌 품종에 이탈리아 품종을 혼합하는 형태 등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와인은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인 글로벌 품종에 이탈리아 품종을 혼합한 녀석입니다. 현대적인 슈퍼투스칸의 캐릭터를 여실히 보여주는 녀석이죠.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대표 슈퍼투스칸들의 뉘앙스를 느끼는 입문용으로 적절한데다, 뼈대 있는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바로 사시까이아(Sasicaia)를 만들어 낸 테누타 산 귀도(Tenuta San Guido)의 막내, ‘레 디페제(Le Difese)’입니다.
레 디페제 2019 빈티지. 레이블에 IGT 표시도 보인다.
이탈리어로 레 디페제는 영어로는 ‘The defence’정도로 해석된다고 하는데요. 병에 붙은 레이블이 재밌게도 사냥개에게 쫓기는 멧돼지입니다. 이 지역에서 멧돼지 사냥이 유행했는데, 야생 멧돼지가 워낙 무시무시한 이빨과 두꺼운 가죽을 지녀서 사냥꾼의 총을 맞고도 사냥개와 대치하곤 했다고 합니다. 레 디페제라는 이름은 이 야생 멧돼지의 어금니에서 따왔습니다.
레 디페제는 사시까이아, 기달베르토(Guidalberto)에 이어 테누타 산 귀도의 세번째 와인(3rd) 입니다. 대체로 와이너리는 자신들의 플래그쉽급 와인 외에 그보다 낮은 가격으로 세컨, 서드 와인을 양조해 판매합니다. 자신들의 정신을 이은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가격대의 와인이지요.
재밌는 점은 사시까이아의 세컨인 기달베르토보다 서드인 레 디페제가 사시까이아에 더 근접한 녀석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미래에 사시까이아를 양조하게될 어린 포도나무들로부터 얻어낸 과실을 사용해 만들어지는데다, 양조 과정에서도 50% 정도는 사시까이아를 양조할 때 썼던 오크통(used oak)을 재사용합니다. 플래그쉽인 사시까이아의 뉘앙스를 물려받은 셈입니다.
저는 2019 빈티지를 마셨는데요. 충분히 맛있지만, 아직 젊고 더 숙성될 잠재력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혹시 여러 빈티지 중 한 개를 고를 기회가 있으시다면 더 숙성된 녀석을 고르시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테이스팅은 WSET 레벨 3 표준을 따랐습니다. 지배적인 아로마는 붉은과일입니다. 레드커런트와 크랜베리류의 붉으면서도 싱싱하고 상큼한 느낌이지만 라즈베리나 붉은 자두처럼 달큰함까지 추가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토마토잎이나 피망 같은 약간의 피라진 계열 아로마(한 여름 제초하는 곳 지나가면 나는 풀냄새와 비슷)가 있습니다. 제가 아직 더 숙성할 수 있다고 본 포인트 입니다. 또 산지오베제 특유의 시큼함은 여지없이 올라옵니다. 특정하기 힘든 말린 허브류 향도 상당히 느껴집니다.
브리딩이 조금 진행된 상태에서는 오크에서 나오는 가장 흔한 아로마인 삼나무(ceder·히노끼탕과 비슷)도 느껴지고, 향신료 뉘앙스도 슬며시 고개를 듭니다. 아주 옅게 정향(Clove·치과 냄새와 비슷)의 뉘앙스도 올라옵니다. 브리딩은 코르크를 열고 와인이 산화되도록 두는 것입니다. 보통 식사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브리딩이 이뤄지죠.
1시간 이상 브리딩이 진행되자 유질감이 살아나는 게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입 속에서 콕콕 찌르는듯하던 산미(acidity)가 버터를 바른 듯 둥글둥글해졌습니다. 토마토 비프소스 스파게티와 페어링(pairing) 했는데, 과하지 않은 산미가 느끼한 맛을 훌륭하게 잡아주고 뒤이어 따라오는 과실미가 입안을 기분좋게 씻어줬습니다. 입 속 모든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간 뒤로는 옅은 향신료향이 여운으로 남았고요.
5만원대 미만의 와인 중 여운이 꽤 섬세하고 훌륭하게 이어졌습니다. 과연 슈퍼투스칸의 혈통이라고 할만 합니다. 일단 슈퍼투스칸을 가볍게라도 느껴보시고 싶다면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묽고 섬세했다는 점입니다. 사시까이아처럼 은근하게 힘주어 밀어붙이는 펀치는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2회에 걸쳐 이탈리아 와인하면 빼놓지 않는 슈퍼투스칸에 대해 이야기해봤습니다. 혁신을 위해, 어쩌면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가장 낮은 등급에서 시작한 와인. 하지만 구식이 돼버린 제도 자체를 뜯어고치고 끝내 최정상에 선 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전환점이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더 큰 목표를 위해 담대한 항해를 준비 중이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저녁엔 슈퍼투스칸 한 잔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