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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May 29. 2023

옛날 경양식 돈까스

자꾸만 생각나는 추억의 맛

 내가 처음 학사식당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언젠가 강릉 원주대 부근을 지나다가 친근한 이름의 예스러운 간판을 보고 들어가게 된 것이 이곳과 나의 오랜 인연의 시작이었다. 프라 모델이 장식된, 다소 특이하면서도 소박한 이곳은 사실 인근에서 소문난 돈까스 맛집이었다.


나지막한 식당 내부에 거의 모든 손님들이 돈까스를 먹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넘어갔다. 기본 돈까스를 시켜놓고 가게에 비치된 추억의 만화책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주문한 음식이 앞에 나왔다.


동그란 플라스틱 접시에는 노릇하게 튀겨진 옛날 돈까스와 양배추 콘샐러드, 피클과 단무지가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돈까스 위에는 넉넉히 부어진 따뜻한 적갈색의 소스가 향기로운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투박하면서도 조화로운 옛날 경양식 돈까스의 비주얼에 절로 진심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위장의 절박한 신호에 따라 왼손에 포크 오른손에 나이프를 쥐고 공략을 시작했다. 바삭하면서도 촉촉한 튀김옷이 완벽히 결합된 돈까스를 자르는 느낌마치 생일 선물을 개봉하는 아이처럼 초조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돈까스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천천히 입에 넣고 맛보았다. 이내 휘둥그래 커지는 눈.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으면서 기본에 온전히 충실한 정직한 맛이다. 바삭 한 튀김옷과 부드러운 고기가 혼연일체 된 경양식 돈까스가 딱 맞는 특제 소스를 맛났을 때, 이것은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한 편의 아름다운 스토리를 창조한다.  


내가 처음 돈까스를 먹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내 나이 열 살 무렵,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우리 반에는 요즘 말로 인싸인 “희”라는 소녀가 있었다. 시내에서 일하는 멋쟁이 고모가 있어서인지 “희”는 언제나 시골 소녀답지 않게 앞서가는 패션 감각과 미모를 뽐냈다. 어린 내 눈에도 그녀의 헤어 스타일과 옷은 예사롭지 않았고, “희”는 타고난 작은 얼굴과 긴 다리로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을 찰떡같이 소화해 냈다. 그녀가 입은 고리바지는 또래 소녀들의 트렌드가 되어 시골학교에 때아닌 고리바지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각설하고, 어릴 때부터 자기 객관화가 잘 된 나는 그녀의 패션센스가 부러우면서도 따라 할 열정은 없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시골 마을에서 고무줄놀이나 하고 앵두나 따먹던 시절에 내가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시내에 나갈 기회는 거의 없었다. “희”는 고모를 따라 종종 시내에 놀러 갔다 와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기한(?) 경험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마침 생일을 맞아 외식을 하고 온 “희”는 시내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돈까스” 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보았는데 아주 비싸고 맛있었다며 아이들에게 침이 마르게 자랑을 했다. 먼저 크림 수프와 빵이 나오고 그다음에 큰 접시에 튀긴 돈까스와 소스, 감자튀김과 샐러드가 함께 나오면 은빛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다고 했다.                         


흑백 TV로 어른들이 보는 뉴스와 동물의 세계나 보았던 나에게 “희”가 말한 “돈까스”라는 신개념 음식은 참을 수 없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크림 수프라니? 은빛 포크와 나이프로 먹는 경양식 돈까스라니? 정말 신기하고 근사하지 않은가! 그날부터 엄마를 달달 볶아서 나도 “돈까스”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넉넉지 않은 시골 살림에 아이 셋을 키우느라 힘든 엄마에게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참으로 철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집 부엌에서는 낯선(?) 냄새와 평소와 다른 분주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엄마는 동그란 양은밥상에 엄마표 경양식 돈까스 한상 차림을 완성하여 가져오셨다. Oh My God!

오뚜기 크림수프 한 그릇과 동네 중국집에서 본듯한 플라스틱 대 접시에 울퉁불퉁(?) 돈까스와 케첩소스, 후르츠 칵테일이 포크 및 과도와 함께 서빙되었다. 어린 마음에 내가 원하던 돈까스는 이런게 아니라고 잔뜩 심통을 부리다가 크게 나고, 결국 식사 때를 한참 지나서 나는 엄마표 돈까스를 먹게 되었다.


돈까스의 튀김옷과 고기는 자르는 즉시 분리되고, 소스는 케첩에 설탕과 물을 넣어 끓인 것이 분명했지만, 처음 먹어본 엄마표 돈까스는 신기하게도 정말 있었다. 후로도 엄마는 가끔씩 나에게 돈까스를 만들어 주셨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완성도는 높아졌다. 내가 타지의 학교를 가면서 더 이상 엄마표 돈까스는 먹지 못했지만, 어린 날의 추억이 담긴 돈까스는 나에게 언제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하고 소중한 음식이 되었다.


지금은 수많은 돈까스 전문점들이 생겨나고 저마다의 맛과 특색을 자랑하지만, 나에게 최고의 돈까스는 바로 어릴 적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서투르고 투박한 엄마표 경양식 돈까스이다. 

강릉 학사식당의 돈까스는 왠지 모르게 옛날 엄마의 맛을 떠올리게 한다. 세련되진 않아도 자꾸만 생각나는, 추억의 그리운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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