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알게 된 J는 참 인형같이 예쁜 친구였다.
언니가 도쿄에 있어서 방학 때마다 일본에 다녀온다는 그녀는 아직 촌티를 못 벗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 동그란 눈과 성냥개비 두 개는 올라갈듯한 긴 속눈썹, 인형처럼 오똑한 코에 작은 입술까지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만한 미인이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옅은 화장과 핑크 빛 립글로스를 바른 그녀가 자리에 앉으면 강의실 전체가 술렁이며 남자 복학생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J의 미소와 옷차림, 모든 것이 신비롭고 관심이 갔다.
일본에 살다 온 영향일까? 평범하고 밋밋한 대학 캠퍼스에서 그녀만이 유독 다른 세상에서 온 듯했다. J가 좋아하는 일본 음악을 함께 들으며 나도 자연스럽게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히라가나 가사와 함께 적어 준 노래의 구절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사이고노 키스와 타바코노 프레이바가 시타
(당신과의 마지막 키스는 담배 향기가 났어요)
니가쿠테 세쯔나이 카오리
(슬프고도 애달픈 향기..)
촉촉한 음색으로 고백하듯 노래하는 여자 가수의 목소리는 가사의 내용과 합쳐져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초 일본어 책으로 독학을 하기로 했다.
처음 접하는 언어라 쉽지 않았지만 J-POP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해하려고 - 사실은 그보다 J처럼 되고 싶다는 사심으로 - 일본어를 시작했다. 내가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것을 기뻐한 J는 나에게 일본 음악과 CD를 빌려주며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길 원했다. 수시로 일본어로 말을 걸며 내 공부 진도까지 체크하려고 하니 한참 부족한 실력인 나는 부담감이 쌓여갔다.
일본어 독학, 이대로는 안 되겠다.
특단의 대책으로 무료 스터디 그룹을 물색했다. 만만치 않은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부담으로 비싼 어학원보다는 스터디 그룹이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일본에서 수년간 살았다는 센세(선생님)가 초보 스터디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발견하고 얼른 그곳에 지원했다. 민들레 영토라는 신촌의 스터디 카페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센세는 서른 살의 회사원이었다.
나처럼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4명의 다른 여대생들과 센세를 만났다. (왜 남학생은 한 명도 없었는지 그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센세는 무역회사에 다니는 서른 살의 남자로 일본어가 좋아서 스터디를 만들었다고 했다. 센세가 정해 준 기초 일본어 문법책을 사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신촌에서 수업을 들었다. 역시 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혼자 공부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속도도 붙고 경쟁심도 생겨 일본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느는듯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J와의 프리 토킹도 가능하리라. 머릿속에는 벌써 오다이바의 야경을 보며 타코야끼에 나마비루(생맥주)를 들이키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웃으며 들어가 울며 나온다.
외국어마다 특징이 있는데 일본어는 초반이 쉽고 뒤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히라가나와 기초 문법은 술술 외워졌는데 가타카나와 한자들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의 언어가 다른 것도 머리가 아팠다. 비슷비슷 구분이 안 가는 가타카나는 꼭 외워야만 하는가? 정답은 예스다. 누가 막상 일본에 갔더니 간판을 못 읽겠더란다. 수많은 외래어와 간판, 상표들이 온통 가타가나로 표기되어있어 결국은 그 산을 넘어야만 했다. 한자의 벽은 또 어떤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 원래 한자와 안 친했던 나에게 일본어 한자들은 큰 난관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6개월 속성 코스가 끝났다.
학교 수업과 병행하며 꾸준히 일본어 스터디에 참여해 드디어 책 한 권을 끝냈다. 속성으로 배운 거라 머릿속은 뒤죽박죽 했지만 그래도 뭔가 뿌듯하고 일본어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생긴 것 같았다. 여세를 몰아 가장 초급인 JLPT 4급 시험을 신청했고 전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중급 스터디에 대한 말이 나왔지만 각자의 전공 공부와 개인사정 등으로 무산되었다. 함께하는 마지막 뒤풀이 자리에는 센세와 센세의 친구 한 명이 동석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며 우리는 예정된 작별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편지와 선물을 꺼냈다.
뵤우기가 아리마스까? (병이 있습니까?)
그날따라 센세는 말없이 계속 술만 들이켰다. 우리는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고 일본어로 애써 농담을 건넸다. 센세의 친구가 대신 사과하며 취해서 쓰러진 그를 수습했다. 센세는 사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오랜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자신의 권유로 이 스터디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어를 가르치며 실연의 아픔을 잊으라고 했는데 이제 스터디가 끝나게 되어 너무나 섭섭하고 아쉬워하는 것 같다고 그는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나타와 센세데, 와타시와 세이또데스.
(당신은 선생님이고, 나는 학생입니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에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문득 센세가 우리 중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 확신에 가까운 - 생각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들킨(?) 줄 안다면 다음날 분명 이불 킥할 일이겠지만, 그저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라고만 여겼던 그의 감정을 눈치챈 우리들은 당혹감과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햇병아리 여대생들에게 서른 살의 회사원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이성의 고려 대상이었으니까.
오 겡끼 데스까.
(잘 지내십니까)
혜성처럼 나타나 내게 일본문화를 전파한 J는 학기가 끝나고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뜨거웠던 나의 일본어 열기도 J와 함께, 또 센세 와의 불편했던 마지막 날의 기억과 더불어 점차 희미하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구석진 책장에서 빛바랜 기초 일본어 문법책을 발견했다. 깨알 같은 메모에 밑줄 긋고 열심히 공부했던 과거의 흔적들을 보니 갑작스러운 그리움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그토록 눈부셨던 J와 고맙고 미안했던 센세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 겡끼 데스까?
(잘 지내십니까?)
와타시와.. 겡끼 데스.
(저는.. 잘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