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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Aug 12. 2022

나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3)  

기와집 테크닉을 미처 마스터하지 못하고 시골로 돌아온 나는 애매한 상태로 개학을 맞이했다. 도시의 미술학원을 짧게나마 다녀본 경험이 그래도 약간의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얼굴 하얀 경은 선녀가 아니라 내가 만나본 백조 무리들 중 하나일 뿐이고, 나도 노력하면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미술시간, 도내에서 개최되는 과학상상 백일장에 나갈 학년별 대표를 뽑는다고 했다. 나와 경을 비롯한 몇몇의 학생들이 따로 미술반에 모여 최종 테스트를 보았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수채화로 완성하는 시험이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우주와 외계인을 테마로 잡았다. 사실적인 정밀화를 주로 그리던 나는 빈약한 상상력을 짜내어 최근 공상과학 영화에서 본 우주선과 외계인을 그렸는데 문득 옆을 돌아보고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비유를 하자면 오리지널 명품과 B급 짝퉁을 함께 보는 느낌 이랄까. 하필 경도 나와 같은 영화를 떠올렸나 보다. 밑그림은 닮았지만 비슷한 건 밑그림뿐이었다.무르익은 수채화 테크닉이 더해진 경의 그림은 우주의 신비를 드러내는 멋진 작품으로 승화된 반면, 나의 그림은 서툰 붓질로 어둠 속에 허우적대는 유치한 외계생물체들의 도가니탕이었다. 우리 조상님들이 와도 경의 그림을 뽑을 수 밖에 없으리라. 당연한 결과라는 듯 새초롬히 나를 보는 경의 시선을 느끼며 쓰라린 패배감을 안고 집에 왔다.


백일장이 열리는 날. 도청소재지인 도시로 가는 버스에 인솔 교사와 함께 대표로 선발된 아이들이 차례로 탑승했다. 여느 때 보다 더 멋을 낸 경이 자리에 앉아있다가 버스에 타는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너두, 가?”


“응-“


“…”


뒷말은 없었지만 분명 그림 대표에 탈락한 내가 왜 가냐는 의문 가득한 시선에 나는 내가 글짓기 부문으로 나간다고 답해주었다. 그렇다. 평소 나의 직설적이고 비판적 독후감을 칭찬하시던 특활 선생님의 추천으로 생각지도 않던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던가. 글짓기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 옥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이 수업 받을 때 - 뭐든 대표로 선발 되어 경과 같은 버스에 타는 것만으로도 상처 입은 자존심이 조금 회복됐다.        


꿈이었던 화가로의 길이 흔들리게 되면서 부쩍 어두워진 내가 걱정된 부모님은 이웃에 수소문하여 지방에서 활동하는 화백을 한 분 수배했다. 작업을 위해 시골에 내려왔다는 김화백은 따로 제자를 받지는 않지만 내 그림을 한번 보고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장발머리가 인상적인 김화백을 만나러 갔다.        


예술가적 아우라를 풍기며 부모님과 인사를 나눈 그는 앞머리가 한쪽 눈을 가리운 채 나른한 목소리로 나에게 아무거나 자신 있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비장한 각오로 스케치북을 펼친 나는 미완성된 기와집 테크닉 보다는 원래 내가 잘하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왜 그때 6.25 전쟁이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나는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 국군과 북한군의 전투를 매우 사실적으로, 온 정성을 다해 묘사했다. 작은 스케치북에 총 들고 대치중인 군인만 십여 명을 그리다 보니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갔고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부모님과 김화백의 조용한 침묵만이 공간을 맴돌았다.


“그만-“


갈색으로 막 바탕을 마무리하던 나를 김화백이 멈추게 했다. 그는 내 스케치북을 들고 한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렇다. 말 그대로 그는 돋보기로 관찰하듯 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멀리서 보면 살짝 개미집 땅굴 느낌이었지만 가까이 보면 군인들의 표정과 모자, 손동작 디테일까지 살아있는 대작이었다. 나는 떨리고 긴장된 모습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입만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침묵하던 김화백은 아주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제가.. 보기에 따님은.. 그냥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뒤에 그는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좁고 치열한 미술계의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해 말하며 다행히 내가 공부를 잘하니까 미술은 취미로 그리라는 덕담을 해주었으나 이미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김화백이 보기에 나는 미술에 재능이 꽝이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가 나에게 최대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나름 고심하며 말 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당시 나에겐 어쨌든 크게 상심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견이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미 의기소침했던 나에게 결정적으로 그림을 단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중학생이 되어 입학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이어지고 각반의 담임 선생님 소개시간이었다. 우리 반은 새로 오신 남자 선생님이었고 상당히 미남이라 은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가는데 복도에서 담임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오랜만이다?”


“네?!”


이럴수가. 잊을 수 없는 이 나른한 목소리.. 그는 장발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김화백이었던 것이다. 미술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그는 돌연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림을 접고 열심히 공부만 했던 나는 그를 만나고 잊었던 아픈 과거를 소환했다.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내 속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나 보다. 원래 바라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이 다르고 가지 않은 길이 더 아름다운 법이지만 어린 시절, 순수하게 그림을 좋아하고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운명은 조금 잔인했던 것 같다. 김화백, 아니 담임이 된 그는 미술반을 운영하며 따로 재능 있는 아이들을 뽑아 그림을 지도했고, 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밖에 던 나는 인생의 이른 시기에 쓰라림을 배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의 길은 어디일까?


아마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인생의 고민과 방황이 시작된 시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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