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처음 만난 우울과 불안의 신체화 증상으로 고통받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된 것은 동네의 나지막한 산이었다. 기나긴 불면의 밤을 지나 날이 밝으면 무작정 밖으로 나와 산에 올랐다. 떨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위와 흙이 덮인 산 중턱을 오르면 세월이 아득한 노송들이 나를 반겼다. 푸른 초목과 나뭇잎들이 뿌연 시야에 안식을 선사했고 산등성이 오솔길에서 굽어보는 먼데 경치가 평화롭고 좋았다. 이름 모를 산새 소리와 풀벌레들, 흙냄새 가득한 정적이 나를 감싸면, 일순 시간이 정지하고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고양 감이 찾아온다. 한없는 평화와 영원의 순간들. 산이 주는 느리고 조용한 치유를 경험하며 하루 종일 산에 머물다가 집에 오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생각해보면 낮이었다고 해도 여자 혼자 산에 가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내가 워낙 머리도 아프고 정신이 몽롱해서 무섭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뿐. 눈만 빼고 검은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남자를 산등성이에서 마주치면 깜짝 놀라지 않겠는가? 멧돼지 출몰 주의라는 경고 문구도 위협적이다. 실제로 야생 멧돼지의 습격으로 등산객이 다치는 사고가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고독한 색소폰 연주자도 만날 수 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백발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는 누구나 알 법한 케니 지의 곡들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곤 했다. 열이 많으신지 늘상 웃통을 벗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산속의 완벽한 공연이라고 해도 좋았다. 방뇨 중인 등산객과의 눈 마주침은 흔한 에피소드에 속한다. 어쩌면 부스스한 머리와 초점 없는 눈으로 매일 유령처럼 산에 오르거나 혼자 앉아있는 나를 마주친 그들이 더 깜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쯤 지났을까. 대학 친구인 선이 연락을 해왔다. 선은 용산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다이어트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프기 전에는 숨쉬기 운동만 하던 내가 갑자기 산에 다닌다고 하니 자기도 운동 삼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선과 함께 수도권 인근의 산들을 탐험하기로 했다. 몸 아프고 힘든 시기에 나와 함께 해준다는 선이 내심 고마웠다.
등산. 누구나 처음은 가벼운 마음으로 입문한다. 등산화 한 켤레만 있으면 수많은 국립공원과 산들을 무료로 다닐 수 있기에 다른 운동들보다 진입장벽이 낮다. 건강과 다이어트는 덤이고 멋진 경치와 인생 샷은 서비스다. 등산이 남녀노소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평일 저녁 선과 만나 주말에 어느 산을 갈지 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초보 등린이들이 첫 산행을 가려니 만만한 산을 선택하고 출입구를 찾는 것부터가 하나의 큰 과제였다. 묵직한 두통과 머릿속에 안개가 걷히지 않은 나는 조금만 신경을 써도 구토 감이 일었다. 결국 손쉬운 대안으로 등산동호회에 가입하여 초보자 산행에 묻어가기로 했다. 서른 초반의 올드미스였던 우리는 3040 등산 동호회중에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곳에 가입하고 북한산으로 가는 첫 산행을 신청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되었지만 친구와 함께라서 용기가 났다. 혹시나 새로운 핑크빛 만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에 몸이 아프다는 사실도 잊고, 도봉구의 북한산 집결지로 두근두근 떨리는 발걸음을 향했다.
(2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