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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27. 2024

깜빡임도 없는 응시

사랑에 대하여 5: 마무리하며

  고단한 작업의 첫째 날이 다가온다. 그가 연구를 시작한다는 시간에 맞춰 생활 패턴을 바꾼 지 일주일이 되었다. 앉은 채로 몸을 풀 수 있을 만한 스트레칭을 정리해 놓았다. 잠시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해 그를 찍어놓을 기기들, 필기할 공책과 샤프, 손이 아플 때 쓸 노트북도 차 조수석에 미리 옮겨두었다. 완벽에 가까운 준비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않은 나름의 학자였다. 대뜸 찾아온 그는 사랑을 연구한다는 말로 소개를 끝낼 뿐이었다. 외양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다. 그는 연구 대상을 자신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매일 쓰는 연구 일지와는 별개로 연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고 싶다는 이유였다. 자신은 한창 몰입한 상태일 테니 장기간의 연구를 조망할 여력이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할 일은 한두 달 간격의 관찰이었다. 그는 일을 맡기며 자기 눈에 띄지 말라고 간청했다. 관찰자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연구가 어그러질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잠복수사를 하는 형사처럼 굴기로 결심했다. 차 안에서 망원경도 써보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잠을 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런 일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내 로망을 순순히 불었다. 그의 승낙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 직후부터 나름의 준비를 시작했고, 내일이 관찰의 시작이었다.


 11월 초, 쌀쌀하다. 창을 살짝 열어놓으면 잠을 몰아내기 딱 좋은 밤공기가 흘러들어오는 시기다. 그가 연구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연구 대상과 관련된 책 몇 권을 구해온 듯하다. 그중에서 노란 책을 집어 든 그는 한동안 그것만 읽었다. 뒤로 갈수록 읽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메모를 시작했다. 무언가를 발견했나 보다. 책을 덮은 뒤 무엇을 더 끄적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공책 한 페이지를 뜯어 벽에 붙였다. 사랑에 대한 그의 첫 결론이었다.


 12월 말에 다시 그를 찾았다. 첫 번째 관찰과 두 번째 관찰 사이에 두 달 정도의 시간을 둔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연말에는 다들 바쁘지 않은가. 이번엔 성탄절도 사람들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그는 특별한 외출을 하지 않은 듯했다. 별거 없는 방 한 칸은 여전했다. 노란 책은 자취를 감췄고, 그의 손에 들린 얄팍한 책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책을 보던 그가 갑자기 벽에 붙여 두었던 종이를 뜯어냈다. 미련 없는 행동에 살짝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져 핸들에 껴안다시피 하며 그와 거리를 몇 센티나마 줄이고자 할 정도였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빠르게 완독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노트북에 띄운 화면과, 책장에 꽂혀 있던 책 몇 권과, 버리지 않은 영수증과 사진을 찍었다. 자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찍었으니, 일상을 남기겠다는 포부쯤으로 보아야 할까. 연구와는 거리가 먼 행동 같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1월에는 여행을 다녀오느라 바빴고, 2월 초에 세 번째 관찰을 시작했다. 화장실에 간 건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벽에는 저번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을 잘 찍는 편은 아닌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얼굴색이 어두웠다. 그의 얼굴색만큼이나 어두운 색의 책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만만치 않아 보였다. 관자놀이를 눌러대던 그는 다른 책을 읽으려다 포기했다. 이번엔 힘겹게 책을 다 읽은 듯했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살짝 움츠렸다. 바깥 풍경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 금방 민망해졌다. 그는 여러 군데에 전화를 걸어 한마디만 하고 끊는 기행을 벌였다. 입 모양을 보아하니 그 한마디는 전부 같은 듯해서 나름 추측해 보려 노력했지만, ‘몰라’라는 두 글자밖에 못 알아들었다.


 한 달 만에 네 번째 관찰을 시작했다. 지난 두 번의 관찰에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짓만 골라하던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댄 채로 새 책을 읽는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느렸지만, 책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곱씹느라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관찰을 마칠까 고민하던 찰나에 그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직 연구할 것이 산더미일 테니 곧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다음 날 새벽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뒤 그로부터 연구가 끝났으니, 기록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된 연구 때문에 내 작업물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파일이 담긴 USB, 혹시 몰라 준비한 출력본을 손에 쥐니 초라했다. 괜히 민망했다. 반면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덧붙였다. 사실 연구를 끝낸 게 아니라 중단한 것이라고, 연구 대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했다. 연구와 대상 사이에는 유난히 긴 호흡이 끼어 있었다. 두 단어 사이에 쉼표가 들어가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대상을 말하는 건지, 연구와 대상 모두를 말하는 건지, 곱씹을수록 헷갈렸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건네려던 찰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니 괜한 생각거리를 더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by.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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