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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Feb 18. 2024

나는 뭐가 문제인가?

사랑에 대하여 3 : 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주의 : 나는 오늘 글에서는 ‘사랑’을 거의 연인 간의 로맨스(낭만적 사랑)에 한정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에 유의해주길 바람.


K-POP 아이돌 음악을 귀에 때려 박으며 하염없이 걷거나 친구들과 근황 ‘썰’을 풀고 인터넷 ‘밈’들을 소비하며 떠드는 와중에도 내 의식 한 편에는 쓸 글에 대한 구상이 돌아가고 있다. 일상의 영역과 사유의 영역은 상호보완적으로 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일상은 꽤 피로하지만, 몸 내외로 달려드는 자극들을 글의 소재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세상은 꽤 재미있다.

그래서 말인데, 사랑을 연달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요즘 머리로 하는 생각의 대부분을 사랑을 위해 할애하고 있다. 교복 입고 다니던 시절에 유행하던 비논리적 콘텐츠(?) 중에서 ‘뇌 구조 테스트’라는 녀석도 있었는데, 지금 내가 그걸 해보면 내 뇌의 반절은 그냥 ‘사랑’으로 차 있게 될 것이다. 그 상태에서 보니 세상은, 생각보다 더 사랑으로 범벅되어 있다. 최근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적이 (진심!) 없고, 소비하는 문화콘텐츠의 절대다수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이 글을 위해 읽은 책인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도 포함된다.

이 책은 에세이처럼 읽히고 책의 영문명도 『Essays in Love』이긴 하지만 소설책이다. 사실 소설책인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철학적 사유, 사색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처럼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해석해 대는 사람과의 연애는 꽤나 괴로울 수 있다. 삶은 때때로 ‘Just Do It’도 필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이자 책으로서 주인공이 던지는 사유들은 내게 도움이 된다. 그러려고 읽는 책이니까.

이 책 속의 말 많은 남자, 그리고 동시에 내 기억을 헤집어 꺼내온, 나를 스쳐간 사랑에 빠졌거나 빠졌’었’거나 빠지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드디어 나는 그 대화를 시작해봐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낀다. 나는 왜 스스로의 연애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가? 당연히 그 대화의 상대는 나 자신이고, 알랭 아저씨의 소설 속 구절들이 나의 얄팍한 방어선을 호되게 파괴해 줄 것이다.

일단 난 바쁜 건 맞다. 수많은 약속, 수업, 역할, 생계, 읽어야 할 책들, 봐야 할 영화들, … ‘너드’(너드‘미’가 아니다. 그냥 ‘너드’다)로서 충실하게 살기에도 바쁜 이 시대에 항상 사랑은 내 우선순위의 끝자락에 위치했으며 연애 같은 ‘메이저 장르’에 스스로를 투신할 시간도 여유도 자신도 없다고 느낀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연애는 거의 인류의 역사와 맞먹는 시간 동안 기록이 축적되고 체계가 정립된 삶의 양식이다. 가장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정형적이라 연애를 원한다면 해야 할 것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연애는 꽤 큰 지출과 노력을 요구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니, 바랄 걸 바라야지.

그럼, 난 정말로 그냥 ‘바빠서’ 사랑을 평가절하하고 챙기지 못했는가?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하는 건 정말 부끄럽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사랑이 두려운 게 맞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주고받지 않는 인간은 도태되었다고 치부되어 왔다. 젊은 육체가 주는 욕망과 치기가 서린 이 시기,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 시기에 쉽게 사랑을 외면해버리고 마는 나의 이 성정에 ‘확신’이란 없다. 내가 무슨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여유가 왜 없어? 여유는 다른 것들을 줄여서 만들 수 있다. 그 여유를 투입해서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고 주저앉을까 봐 두려운, 그 한 번의 거절도 두려운 나의 ‘찌질함’이 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안 믿는다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사람들의 진실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방식일 뿐이거든요. 사람들도 사랑을 믿지만, 그렇게 믿어도 되는 상황이 오기 전에는 아닌 척하죠.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냉소주의를 던져버릴 거예요. 하지만 다수는 그럴 기회를 결코 얻지 못하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에 나올 법한,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구애하고 고백하고, 때로는 다투고 화해하는 일련의 연애 스토리를 담고 있다. 주인공과 연인 ‘클로이’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 나도 이런 사랑을 해보고 싶은가? 하면 2024년에 읽기에는 매력이 좀 떨어지는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그러니까, 내 생각에 주인공은 좀 구시대적인 것이 맞다. 다만 클로이를 위해 이 사랑은 훌륭하다고 하자.)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사랑에 대한 단상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이 이토록 유명한 이유는 스토리 그 자체보다는 사랑의 모든 과정을 낱낱이 사유하는 주인공의 끝없는 생각과 난무하는 철학자들의 이론 향연 덕분인 듯하다. 예컨대 방금 인용한 위의 문단은 거의 나를 저격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에 대한 나의 불신은 아무래도 ‘방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은 어차피 영원하지 않다”며 거만하게 눌러앉은 내 잘난 냉소주의는 누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눈 녹듯 와해될 것임을 안 봐도 알겠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사랑받고 싶은 욕망’보다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앞세우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나의 자기혐오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으레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늘 부족한 사람임을 숨길 수 없고 늘 온갖 자괴를 마음속에 긁어 담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인생에서 아무리 해도 모자라고 필요한 작업이지만, 나를 알면 알수록 나는 이런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란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건 미련한 생각인 것이 맞고, 만약 내가 나를 친구로서 마주했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해서든 생각을 고쳐먹게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자신에겐 한 없이 냉철한 법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알고 있어도 통제하지 못하니까, 자기혐오는 늘 나를 위협해 왔다. 늘 나는 나를 숨기는 일에 몰두했고 남들이 내 본모습을 알게 하는 일을 회피했다. 내 안 깊숙이 내려앉은 비주류의 찌질함. 난 그것과의 전쟁을 치르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점은, 나는 내가 가진 문제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필수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대단한 영화적 사랑은 아닐지라도(그리고 아닌 게 당연하고!) 세상에 나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눠주고 적어도 조금 더 높은 확률로 내 편이 되어줄 동반자가 필요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연약함을 잔뜩 드러낸 글을 썼지만, 그렇게 살다가만 떠나지는 않겠다!라고 발버둥을 치겠다는 약속 또한 이곳에 적어본다.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럼, 난 뭘 하겠다는 말인가? 내 생각에 분명 지금 먼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나를 사랑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조금씩 내가 스스로 단점이라고 생각해 오던 것들을 진심으로 있는 그대로 ‘나로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극복방법]
- 회피에서 벗어나려는 에너지를 내부의 변화로 연결하자.
- 운명에 따라 나가자. 도망치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가 결정적 열쇠이다. 후에 벌어지는 일은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자.
- 피하지 말자. 피하는 건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생 묘미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  
-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지 말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이 먹어 가기보다 실패라도 좋으니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낫다. 실패했어도 다른 것은 잘 해낼 수 있다. 인생은 자유로운 것이고 선택할 것은 얼마든지 있다.
- 할 수 없다는 믿음을 버리고 과거를 놓아주자..

나의 성인애착유형 테스트 (http://typer.kr/test/ecr/) 결과 중에서


언젠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심심해서 해본 ‘성인애착유형 테스트'결과는 생각보다 내게 도움이 되는 극복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사랑은 진지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그 ‘사랑’이라는 두 음절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큰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이 녀석을 감당할 마음을 먹는 수밖에 없겠다. 그래, 할 수 없다는 믿음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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