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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Feb 18. 2024

진짜 두려운 건

사랑에 대하여 3 : 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뭐라고 해야 될까, 논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논문. 일반적인 소설을 예상하고 본 나에게는 약간은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영어책을 한글로 읽을 때의 결코 지울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을 꽤나 어색해하는 탓도 있었기에,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흔한 남녀의 연애, 그것의 파노라마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책은 주인공인 ‘나’와 ‘클로이’의 연애 이야기를 총 24개의 챕터를 통해 풀어낸다. 그 챕터들은 로맨스의 클리셰라고 불릴만한 단계를 시간순으로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한쪽이 마음이 떠나 헤어지고, 아파하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 책 제목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이듯이, 각 챕터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나’ 또는 ‘클로이’의 감정의 ‘왜’를 분석한다. 어째서 모르는 사람에게 끌리는지, 의미 부여를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서로에게 더 엄격하게 구는 건지 등. 물론 그 분석의 과학적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철학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는 책에서 나타난 연애의 모든 기승전결을 다룰 수 없으니 인상적이었던 챕터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안헤도니아(Anhedonia)

‘나’와 연인 ‘클로이’는 스페인의 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의 풍경을 보던 ‘클로이’가 갑자기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급하게 의사를 찾은 후 그 의사에게 들은 병명이 바로 ‘안헤도니아’이다.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생기는 병으로, 책 속에서는 ‘갑자기 지상에서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 눈앞의 가능성으로 대두되면서, 그런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하여 격한 생리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위 단어가 등장하는 챕터의 제목은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현재의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느끼는 행복에 대해서 그것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괜한 긴장감을 느끼려는 것. 책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읽어보자.


“어린 시절 집에 돌아오고 난 뒤에야 명절이나 연휴가 완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가 되어야 현재의 불안이 안정된 기억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겨울방학을 고대했다. 가족이 두 주 동안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나무로 덮인 골짜기와 위가 부서질 듯한 파란 하늘을 보면 실존적인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기억에는 그런 불안이 증발해버리고 없었다. 기억은 객관적인 조건들로만 이루어져서, 실제 그 순간을 힘겹게 만들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안은 (…) 한 해 내내 나를 위로해주었던 미래의 가능성 하나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p. 177)


과거는 미화되고, 미래는 기대된다. 그래서 남은 부정적인 것들을 현재가 끌어안은 것이 아닐까. 나를 위로해 주던 ‘미래의 가능성’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완벽하다. 하지만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완벽한 행복이 다른 무엇으로 손상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것에서 오는 초조함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상태를 여유롭게 누리기보다, 사냥한 동물을 다급하게 박제하듯 추억의 한자리에 밀어 넣는 것이다.

사랑이 주는 행복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에 더더욱 취약하다. 책은, ‘이성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 쉬운 반면, ‘자족적인 지속성이 결여’된, 즉 ‘내 삶에서 그 행복을 빚어낸 요소를 통제할 수 없’는 행복은(작가가 클로이와 ‘나’의 사랑이 신의 기적적 개입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을 참고하자)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사랑이 주는 행복은, 그 행복을 갖게 된 인과 과정이 확실하지 않아 불안한 것이고, 확실성이 부족한 원인은 갑자기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기에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연애란, 그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원인의 확실성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는 시도의 연속이다. 특히 연인 사이에서의 다툼이 그러하다. 서로 사랑하기에 다투는 것이다. 그 확실성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느끼는 서운함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오히려 그 확실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절박함 때문일 수도 있다. ‘서로 파괴하려고 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안전함을 느낀다는 책 속의 말처럼, 연애를 할 때 우리는 활활 타는 불에 손을 넣어봐야 뜨거운 걸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두려움이 극에 달할 때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지나친 사랑이 초래할 수도 있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결국 불확실성과 위험을 견디지 못하고 엔딩 크레디트를 올려버릴 수도 있다.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는 해도 우리에게 심각한 행복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두려움> 챕터를 여는 첫 문장이다. ‘심각한 행복’은 왜 문제가 되나. 우리의 마음은 팽창은 잘 하지만 수축은 잘 못하지 않나 싶다. 고무줄이든 용수철도 임계점을 넘어서까지 늘려버리면 다시 수축하는 능력을 잃듯이, 마음도 비슷하다. 사랑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행복의 크기만큼 마음을 늘려 놓은 뒤, 끝날 때쯤 그곳을 비워버린다. 텅 빈 그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이나, 마음을 다시 원래 크기로 돌리는 것은 그만큼의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하기 어려워하며, 또 누군가는 사랑을 끝내기 어려워한다. 그것은 현명한 걸까 겁쟁이인 걸까.

사람들을 만날수록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에는 더욱 큰 용기가 필요해지는 것 같다. 인생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딱 한 번의 시도 이외에 하라고 해도 다시 못 할 것들이 있다. 이제는 얼마나 힘든지 알아서 시도조차 할 수 없어진 것들. 사랑을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건 아니지만, 상처를 받을수록 시작하기 어려워지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얼마나 아픈지 아는 상처를 앞에 두고 걸어가는 것은 그만한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



by.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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