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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삶을 사랑하기 위한 숨죽임의 순간

사랑에 대하여 4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어떨 때 예술을 감상할까? 내 주변에는 나에게 읽을 만한 문학 작품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친구의 취향이나 읽기 수준을 고려하여 적합해 보이는 작품들 몇 개를 제시하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그들은 왜 문학 작품을 읽으려고 하는 걸까. 그 행위의 동기가 가늠이 안 되는 이유는 간명하다. 나는 관성적으로 책을 읽긴 하지만, 내가 문학을 갈망하고 능동적으로 책을 집어드는 순간은 늘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점은 언제나 내가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이며, 대개 나의 시간들은 그런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삶의 순간들은 다양한 감정이 스며든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가 건너온 시간들을 반추해 보면 대개 잿빛이었다. 그 회색의 순간들을 겹쳐 놓으면 검고 탁한 감정들이 떠오르고, 나는 그것을 쉬이 내다 버릴 수 없는 유리 조각처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기억의 첨단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수반한 채 나를 찔러올 때마다 나는 문학 속으로 숨어들었다. 거기에는 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듯한, 혹은 나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 같은 이들의 문장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깊이 있는 생각들의 뒤범벅, 심연에 대한 통렬한 응시와 세계에 만연한 고통을 담아낸 미문들을 읽을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을 겨우겨우 참을 수 있는 차원의 것으로 돌려놓았던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이 축적될 때보다 나는 내가 사람보다도 책이나 글과 더 맞닿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열렬히 체감했다.


이렇게도 나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낸 것은 이 책의 저자이자 서술자 ‘나’인 브링리의 심정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에세이와 예술에 대한 비평을 넘나드는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전도유망한 직장 《뉴요커》에서 근무하다가 사랑하는 형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이나 의지를 상실한 저자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 일을 시작하며 예술 속으로 은신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가던 삶을 잠시 중지시키고, 미술관 속에서 여러 예술 작품들을 바라보며 보편적인 차원의 사유부터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성찰하는 작가의 독백이자 서술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상실의 고통이 끝없이 범람한 상태에서 질식하기보다는 잠시나마 숨통을 돌릴 만한 방공호를 찾던 자의 포즈라고 명명해야 할까.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나가면서 작가는 동료 경비원들 및 미술관 관람객들과 교류하면서 삶에 대한 의지를 복각하며 삶을 향해 다시 한 발짝 걸음을 뗀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


(…)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부분


사랑하는 형을 떠나보내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을 둘러싼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을 선택한 저자는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예술을 비롯한 인간과 삶 전반에 대한 사유와 인식을 개진한다. 예술은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이지만, 이를 말함으로써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상기시키며 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는 본질적 사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발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단순히 예술 속에 도피하는 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사랑과 이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발굴해 낸다. 이는 형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며 공고해진다. 형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예술. 즉, 작가는 예술을 통해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고, 결국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꺼이 이를 수행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숨죽임의 순간 속에서 삶의 의지를 다진 작가를 보며 되돌아본다. 나는 삶이 부여하는 가혹한 질서가 싫었고,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고통스러운 유년과 그러한 시기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부조리함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래서 언제나 삶이 싫었고, 사람이 싫었다. 끝없는 증오와 혐오만이 나를 추동하게 했다. 그렇기에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글과 그림과 음악을 들으며 자아 속으로 나 자신을 유폐시켰다. 읽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쓴 글들도 늘 그러했다. 하지만 열아홉 때, 전공 선생님이 수능 전날 주신 편지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 편지: ‘시를 꾸준히 써가길 바라.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렴. 내가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성찰하는 사람은 삶을 소중히 할 수 있거든. __아, 삶을 소중히 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__이길 바란다. 당연한 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지. 하지만 ___에게는 그런 힘이 있단다.’


내가 그토록 많은 책장들을 넘겨 왔던 것은 사람과 삶에 대한 증오와 환멸과 혐오를 확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반증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러한 나라도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고, 그러한 위로를 어떻게서든 찾아내고 싶었기에 수백 권이 넘는 시집과 소설을 읽어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든 주어진 삶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페이지를 넘기고, 활자를 응시하는 그 숨죽임의 찰나가 삶을 사랑하기 위한 눈짓이었다는 것을.



by.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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