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덕분에 보기 드문 귀한 아이들을 많이 봤다. (그러나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은 못 만났던 듯하다.)
부모와 나들이 왔을 법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다닐만한 아이들 아니 아이를 보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평일은 더 드물었고 주말에나 있는 일이었다. 출산율이 0,7이라는 통계 수치가 그냥 있는 말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날들이었다.
하긴 우리 면에도 폐교가 두 곳이나 있다. 내가 다녔던 본교인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는 한 반에 6~70명 되는 반이 무려 세 반이었지만 지금은 한 개 반 밖에 없는 데다 학생도 30명 남짓이란다. 더군다나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어린아이를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다.
그러기에 어쩌다가 유모차를 탄 아가들을 보면 반갑기 그지없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꽃밭 구경 하는 걸 보면 입가에 저절로 웃음기가 돌곤 했다.
그런데..., 유모차는 아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이번 문화제 기간 동안 알게 됐다.
멀리서 유모차를 밀고 오는 여인이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아기 엄마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있어 보였다. 늦둥이인가 보다 했는데...,
눈앞에 가까이 왔을 때 비로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놀라움과 낯섦이 뜀박질하는 가운데 유모차 안의 생명도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개였다.
뿐만이 아니라 개를 포대기에 업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머리털에 리본을 묶고 예쁜 빛깔옷을 입힌 뒤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목에 맨 줄을 잡고 다니는 사람과 발발발발 이쪽저쪽 눈 닿는 대로 가고 싶어 하는 개들도 있었다.
15,0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개의 조상은 늑대라고 한다. 인간과 상호 공존하면서 개가 되었고, 인간은 개를 부리기 시작했다. 늑대의 본성을 살린 사냥개로, 다른 가축을 지키는 개로, 집 지키는 개로. 그러다가 다른 종끼리의 교배를 통해 여러 품종을 만들었고, 여러 곳에 필요에 따라 부리고 있다. 군견, 경찰견, 경주견, 안내견...,
그리고 가장 많게는 애완견으로 삼기 시작했다.
사전을 보면, [애완견 :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개]라고 한다.
그러나 '애완(愛玩)'이라는 말은 애착하는 장난감이라는 뜻 같아서인지 언제부턴가 반려견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사전을 보면, [반려견 : 한 가족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 又 보호자와 한집에 살면서 가족처럼 보살핌을 받는 강아지]라고 돼있다.
반려(伴侶)라는 한자를 보면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예전에는 주로 부부에게 썼던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개한테 써도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강아지 또는 개가 사람들의 삶 속, 그러니까 마당가나 대문 옆이 아닌 집안으로 들어오고 거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은 걸로 안다. 우리나라의 8,90년대만 하더라도 부잣집에서 키우는 개와 서민들이 키우는 개는 달랐다.
솔직히 개의 종(種)을 잘 모르기에 크기로는 강아지인지 개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하나 같이 비슷비슷한 분위기로 본디 제 모습인 개는 한 마리도 없었다.
본디 털모양이 어땠는지 당최 모를 정도로 온몸의 털은 매끈하게 깎아내고 앞발 뒷발 쪽과 꼬리 귀 있는 곳만 복실복실한 털이 단발머리처럼 짧은 개, 다리가 짧아 안짱다리 같은 데 몸통은 살이 찌고 주름진 불독 같은 개, 치렁하게 늘어뜨린 털을 부위에 따라 리본으로 묶어놓은 개, 썰매 끄는 개처럼 덩치가 송아지만한 개, 뼈에 가죽을 씌워놓은 듯 말라 보이지만 목걸이와 다른 액세서리를 한 개...,
예뻐서 찍은 사진
암튼 유난히 개판(?)인 날도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개는 메밀꽃 같은 건 볼 수 없는 듯 보였다. 앞서 가는 사람들 종아리나 발목, 메밀꽃 대궁만 보일 것 같다.
목줄에 묶여 주인이 이끄는 대로 졸졸졸 좇아다니는 개한테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 뭐가 보이니?"
인연, 인연, 인연!
직업 군인이었을 때 전국을 돌며 살아보았기에 노년의 삶은 평창에서 보내고자 하시는 시인의 음악 동무들이 무료 공연을 하고 계시기에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웬 젊은 남자가 내게 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는 인연인가!'
가까이 다가갔지만 얼른 떠오르질 않는다. 그러나 낯설지 않다. '분명 아는 인연은 맞는데...!'라며 기억을 쥐어짜 내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먼저,
"버폐 스님 맞으시죠? 저 미얀마에서...,"
"아..., 아, 맞다. 어머, 어떻게 여기서...?"
무료 공연 & 반가운 인연들
십 오륙 년(?) 만이다. 눈앞에 앉아있는 그를 보자,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당원으로 미얀마에서 활동 중일 때 만났고 생활공간이 있었기에 아는 스님과 초대를 받아 갔던 집에서 손수 해주는 한국 음식과 떡볶이를 먹었던 기억도 추억으로 재빠르게 일어나 주었다.
기억을 뒤적거리다가 서로의 근황도 나눈다. 그의 옆에 있는 멋진 이를 소개한다. 아내란다. 코이카 활동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인연이 됐단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대 평창 캠퍼스에서 박사 과정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준다.
"아, 멀지 않은 곳에 있군요?"
사람들이 세상은 좁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하곤 하는데 새삼 와닿는 말이다.
별처럼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국에서, 5천만 국민의 저마다 분야에서 또,
몇 만 분의 1 인연으로 잠시 만났다가 헤어진 뒤로는 저마다의 추억 또는 기억에나 저장돼 있을 사람을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안 좋은 인연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는 우리 기억 속에 함께 있는 분이 주신 차를 우려 마시면서 잠시 정담(情談)을 나누었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는데 마치 꿈을 꾼 것만 같다.
사람 사는 세상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하많은 인연을 짓고 산다. 인연을 짓겠다 의도하지 않아도 살다 보면, 살아가다 보면 짓게 되는 것이 인연이다.
그런 인연 가운데는 얼굴을 마주하고 말이라도 나눈 인연이 있는가 하면,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얼굴은커녕 말도 나누지 못한 인연도 있다.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는데 무슨 인연인가 하겠지만 기억에 남아있으면 인연인 거다.
계산대를 맡은 고니 시인이 만 원짜리를 내게 건네며,
"책은 안 사고 대신 보시하겠다며 주고 가셨어요."
얼떨결에 받기는 했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내 앞에서 차를 마시고 말을 나눴어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그는 보았던 것이고 그는 어쩌면 신심이 두터운 불자일지도 모른다. 보시한 걸 내세우지 않으면서 현금으로 인연을 짓고 간 것이다.
(미얀마 학생들 장학금으로 보냈다.)
함께 했던 순간들
열흘 동안 차를 마시며 만난, 또는 몇 마디 주고받긴 했지만 이내 머리가 너무 작아 뚜렷이 생각나지 않는, 꿈속의 한 장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스치듯 맺은 인연들은 너무 많다.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내 책을 사시는 분들에게 (뒤늦게) 이틀 째부터는 이름을 써달라 했다. 싸인을 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지만 추억의 공책으로 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 분이 응원의 글까지 남겨주었다. 첫 경험이다. 또한 잊지 못할 인연으로 남았다.
문화제던 축제던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돈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는, 엄청 남는 장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