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데리러 왔다. 저녁 6시 15분, 여름 같으면 해가 산등성이를 향해 기어가고 있을 때지만 겨울인지라 한밤중처럼 어둡다.
도로옆 비탈에는 동짓날 내린 눈이 얼려놓은 쌀가루마냥 쌓여 있다.
장평과 속사 삼거리까지 신호등이 네댓 개쯤 있는데 한두 번 빨간 불빛으로 바꿔주면서 멈추었다 가란다. 그렇게 30분 남짓 달려갔다.
진부장례식장, 2호실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근조 화환이 늘어서 있었다. 고인(故人)의 조카가 문상객을 맞으며 방명록을 내민다. 그 옆에는 "고인에 뜻에 따라 부의금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쓴 안내문을 써놓은 종이가 놓여있었다.
고인과의 인연은 지지난해 도서관에서 여는 문화 강좌 가운데 디카시 사진반에서다. 디지털 사진기 또는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취미를 살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고, 나 또한 기능을 배우는 시간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상반기 몇 달, 하반기 몇 달로 한 해를 보냈다.
어떤 날은 실내 수업으로 도서관 안에서 어떤 날은 농원, 목장, 박물관, 문화공간 같은 곳으로 사진 찍기를 나가며 그 결과를 선보이는 전시회도 여는, 그렇게 '함께'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곤 했다.
그와 함께한 시간 가운데는 사진반만의 명상 수업 & 포트락 잔치도 있었다. 나는 솔직히 혼자 사는 그가 음식을 만들어 오리라는 예상은 안 했다. 그런데 그는 (많지 않은 양이긴 했지만) 달걀부침을 만들어 반찬통에 담아왔다. 우리는 저마다 칭찬을 하면서 맛나게 먹었다. 그는 그날 낯선 부엌에서 늦게까지 설거지도 깔끔하게 하고 갔다.
사진반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점잖고 성실하고 (사진 수업에) 모범생이었다. 좋았던 기억과 추억에 힘입어 올해도 자연스럽게 모였는데, 나로서는 지난해 함께 했던 벗들의 이름과 얼굴이 있어 반가웠다.
우리는 지역 곳곳을 탐사하며 그곳에 대한 역사나 유래에 대해 배우며 사진으로 알리는 일을 해보기로 했는데 고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참을성과 함께 밤하늘의 은하수 사진을 잘 찍고, 렌즈 활용을 잘하던, 사진 찍기에 진심이고 자신만의 세상이 분명했던, 지지난해 지난해까지는 수강생으로는 청일점이었던 그가 언제부턴가 나오질 않았다. 함께 같은 차로 이동하거나 별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지인이 안부 전화를 했고..., 암진단을 받고 치료받으러 다닌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왔다.
천성이 그런 건지 아니면 살아오는 동안 형성된 것인지 모를 그의 성품은 말이 없고, 좋다 싫다 표현도 안 하는 편이었다. 말이나 표현 대신 담배를 더 많이 찾는 듯했고, 사진도 일행과 떨어져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듯 보였다. 차 한 잔 밥 한 끼 먼저 나누는 일도 없었던 만큼, 기쁜 일 좋은 일 답답한 일 화나는 일 고민 따위도 없거나 털어놓을 사람도 없을 것만 같아 보였다.
페이스북에 뜨는 이름이 '투덜이'인 걸로 보아 세상 살아가는 일이 행복하거나 즐겁거나 평화롭지는 않았던 듯하다.
비록 많은 말을 나눠보진 않았지만 주고받은 몇 마디에서도 그의 성향이나 기질이 느껴졌는데 밝은 느낌은 받지를 못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굳이 빛깔로 말하라면 어두운 잿빛에 가까웠다. 세상에 좋은 것이라곤 없는 사람 같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이런저런 모임 활동은 하는 듯 보여 그나마 다행으로 보였는데 암 치료 라니...,
2년 남짓 동안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만나며, 한 공간에서 밥도 몇 번이나 먹은 인연이기에 모르는 척하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카카오톡 단톡방에 있는 이름을 찾아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했고, 안부와 함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전해 주며 몇 번 만나기도 하였는데..., 그에게선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느라 결혼도 하지 않은 그는 누님과 누님 가족이 곧 그의 가족이어서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의 바람에 따라 치료를 받는 듯 보였다.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는 그의 누님 말에 따르면 온몸으로 전이가 된 지난 9월에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이되기 전에도 간절하지 않아 설득하는데 힘들었다는, 살고 싶도록 50% 설득하고 돌아서면 마무리하려는 쪽으로 다시 돌아서는 아픈 동생을 보아야 하는, 누님은 그 기간이 지옥이었다고 표현했다.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동생의 뜻이 그러하여 그 뜻을 받아들이기까지 지옥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는데, 나중에는 먼저 정리해 줘서 고마웠다는 누님에게 다 마르지 않은 눈물이 보였다. 아직 남은 눈물이 들렸다.
국화꽃에 둘러싸인 사진 속 그의 모습을 보았다. 장례식장에서 흔히 보는 영정 사진이 아니었다. 영정 사진을 미리 따로이 찍어두지 않았을, 아직은 젊은 나이의 그가 엷게 웃고 있다. 그 순간은 행복했을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했다는 그, 부의금 대신 가는 길 배웅하는 지인의 이름을 안고 가고 싶었을까!
여러 개의 근조 화환과 방명록에 남긴 이름의 주인들이 진심으로 그의 저승길을 배웅하리라 믿으면서 그가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베푸는 음식을 먹는다. 그의 달걀부침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