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기차를 타보고 싶다던 벗에게 - 9
수진, 지난밤 묵은 방은 나무로 된 산막이었어. 말 그대로 산사람들이 묵는 방이었던 거야. 방은 좁아도 침상은 둘. 묵고 가는 이들이 별로 없기에 방이 많지 않은 거지. 우리는 셋, 방이 없다며 함께 써야 한다기에 그런다고 했어.
그리 크지 않지만 싱글 보다 조금 큰 침상에는 나와 림이, 조금 작은 침상은 스님이 쓰시는 걸로.
쓴다고 하지만 이불은 가지고 간 침낭을 쓰는 거고 한 데의 눈바람을 막는 정도가 아닐까 싶어.
그리고 씻는 건 바깥으로 나가서 한정된 따뜻한 물을 써야 했어. 너무 추워서 겨우 이를 닦고 젖은 발을 닦는 정도?
씻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젖은 옷을 갈아입는 정도만 해야 했지. 가지고 간 물병의 물이 사각거리는 얼음으로 바뀌었어. 그만큼 추운데 두 개의 침낭을 겹쳐 쓰고 덮고, 꽁꽁 끼어 입은 덕분인지 춥다고 느끼지는 않았어.
하지만 가슴이 뜨끔뜨끔 아픈 건 사라지지 않더구만. 뽀개지는 것 같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은 없던 통증이 새로 생긴 듯해.
고생스럽게 온 ABC의 아침, 그곳에서 잠을 잔 트래커(Treker)들이 아침의 안나푸르나를 보기 위해 추위를 털어내며 Camp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어. 하지만 엄청나게 쌓인 눈과 에이는 추위에 금방 두 손을 들고 말더군.
어느 서양 트래커는 콧물이 흐르다가 코밑으로 그대로 얼어붙어 하얀 눈길처럼 두 가닥으로 나있는데 전혀 우습지 않았어. 그곳에서 그곳만의 감정이 생기는가 봐.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Hall로 들어갔어. 난로가 켜있어서 금방 따뜻함이 감돌기 시작했어.
우리는 아침으로 짜파티를 먹고 남들보다 일찍, 그러나 가장 먼저는 아닌 8시에 출발했어.
남들의 발자국을 길 삼아,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의지하고 내려가야 했어.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저마다 눈길에 빠지고 미끄러지고 자빠지길 거듭했어.
나도 바짓가랑이와 버선이 눈에 젖어들고 있었지. 신발은 새지 않았으나 눈 속에 빠지면서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가고 있던 거야.
아, 생각해 보니 이와 같은 눈길을 언제 걸어보았던가! 얼마 만에 걸어보는 눈길이란 말인가! 감격스러웠지. 너도 분명 그랬을 거야.
아주 어렸을 때 눈밭을 뛰 다니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가운데 내리막길이 시작됐어. 조심스레 걷는다 했지만 미끄럼 타고 말았지.
3시간 반 만에 '데우랄리'에 도착.
스님과 림이는 빌려신었던 신발과 빌린 값을 치르고, 우리는 국수와 볶음밥으로 점심을 시켜 먹었어.
나도 젖은 버선을 벗고 마른 양말로 갈아 신었어. 젖은 바짓가랑이는 무릎 위로 걷어 부치고 젖은 버선은 지팡이 손잡이에 씌워 들고는 다시 출발~
해가 뜨고 햇살이 내리 쬐이는 곳에는 눈이 녹아서 질척거렸어. 눈길보다 걷기가 더 안 좋더구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올라갈 때 그토록 위험하고 힘들던 길이 내려가는 동안에는 길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느껴지는 거야.
물이 줄어 있는 곳도 있고 혼자 힘으로도 여유롭게 갈 수 있는 길이 되어있는 게, 분명 어제는 징검다리가 잠겨서 바위를 기어오르고 서로 잡아 주고 건너뛰었던 길인데 말야.
밤새 사뭇 달라진 길, 징검다리 길도 쉽게 건넜어.
그렇게 오후 1시 50분경 '히말라야'를 지나치고 나니 산능선의 희끗하던 눈도 보이질 않대?
'뱀부'까지 갈 예정인데 다리가 무겁기 그지없고 몸도 천근만근처럼 느껴졌어.
나는 지난밤의 벅찬 감동을 되새기며, 꽃을 보고, 하늘을 보며 여전히 거북이걸음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먼저 내주며 시늠시늠 걸었어.
오후 다섯 시, 드디어 '뱀부'
오늘 밤은 여기서 묵을 거야.
어제의 날씨와는 정말 다르게 오늘은 참으로 맑았는데 그 맑던 햇살이 사그라들고 있어.
짐을 풀고 따뜻한 물로 피로를 씻었어.
하루 밖에 안 됐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일처럼 푸근했지.
씻고 난 뒤 저녁을 시켜 먹었어. 안도감에 모처럼 달밧을 시켜 먹는데 다른 곳보다 싸고 맛도 좋았어.
그리고 더욱더 놀란 일은 식당 주인이 김치를 주었다는 사실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감동이었지.
조금은 곰삭은 맛이었지만 우리 김치와 다름없는 맛이어서 놀랐어. 더군다나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내주는 그 마음씨에 참으로 감동하는 저녁이었지.
안나푸르나, ABC캠프까지 올라가던 순간 도착하던 감동, 그리고 Green View Lodge의 곰삭은 김치를 받은 감동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듯해.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