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일기
산골의 밤은 캄캄하다. 덕분에 별빛은 더 밝다. 언젠가부터 별들 사이에 크고 새로운 별(?)들이 떠있다. 인공위성이란다. 문명의 힘이다.
온누리를 보더라도 그렇고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1,20년 전과 견주면 눈에 띄게 발전했고 3,40년 전과는 견줄 수 없고, 5,60년 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은 상상할 수 없던 세상이라고 말한다.
보릿고개를 기억하는 그때의 사람들에게 지금 세상은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졌고 편리해졌다. 편리한 것만 보면 천국이고 극락이리라.
편리해진 만큼 마음도 편안해야 하는데 오히려 '지옥 같다'라는 말은 더 자주 쓰고 있다.
편리해진 만큼 마음은 더 여유롭고 너그럽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우리나라 80년대에는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게 있었다. ('라떼는 말이야~'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퇴근하면서 친구들과 포장마차나 고갈비집 곱창집에서 쏘주 한 잔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 타고 병원 갈 때 일당 몇 천 원짜리 노동자는 손가락 잘린 채 해고당하는 현실의 울분을 털어놓으면서 '이게 사람 사는 거냐? 북한도 이러진 않겠다.' 한 마디 했다가 다음 날 국가보안법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감옥에 보내져서 생긴 말이다.
나는 새도 떨어지게 한다는 국가 기관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을 현실로 일어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고 엄혹했다. 늘 엄동설한이었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은 길거리 골목 술집에서 친구들 만나는 일도 감시를 받아야 했고, 노동자는 대학생, 대학생은 노동자 벗을 두면 안 되던 때였다.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정보과 형사들과 경찰들이 대학생처럼 또는 노동자들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곳곳에 숨어 있다가 의심되거나 의심 드는 이들을 경찰서 또는 안기부로 잡아가곤 했다. 그들을 '사복경찰'이라 불렀다. 사람들을 잡아갈 때 물불 안 가리고 힘을 쓰는 이들도 있었는데 '백골단'이라 불렀다. 그때는 그랬다.
이와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일을 미얀마에서 듣고 본 적이 있다. 지금은 군부 정권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에 더 심해졌고 어느 곳은 시골로 갈수록 심하다고 한다.
미얀마로 진리를 구하러 갔던 휴는 국제(meditation) 센터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국제 센터에서 본 현실이 우리나라 사찰 또는 시민선방의 현실과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이들만 가는 곳'이 (위빠사나 명상 센터) 사원(절)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1,500명의 수행자가 먹고 자고 수행할 수 있는 도량에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돈 벌러 서울(양곤)로 온 시골 젊은이들도 많았고 아직은 어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청소년들도 많았다. 부푼 희망을 안고 양곤으로 돈을 벌러 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짐꾼이나 식당에서 주문받고 음식을 나르거나 설거지, 또는 호텔 청소, 가게의 잔심부름이었다. 그 또한 빨리 구하지 못하는 일이므로 아는 이들의 연(緣)줄 연줄 따라 (직장을 구할 때까지) 명상 센터에서 공양간의 일이나 도량 청소를 하며 지냈다.
보시하는 (자원봉사) 일이기에 돈은 못 받지만 먹고 자는 일은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그 센터로 수행하러 오는 이들은 먹고사는 일에 여유가 있는, 다시 말해 시간이나 돈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공양간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입는 옷이 달랐고 몸에 걸친 장신구도 달랐다.
휴는 그런 차이가 보여서이기도 했지만 목적이 진리를 구하기 위함이었기에 (진리가) 그 나라 서민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걸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또는 서양에서 미얀마에 수행 또는 순례 여행을 하러 간 이들이, 발우를 안듯이 들고 걸어가는 승려의 행렬을 보거나, 그 행렬을 기다리는 신도들이 흰쌀밥을 가득 담은 큰 그릇과 주걱을 들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공손하게 스님의 발우에 밥을 퍼주고는 길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보면 불교 국가임을 실감하면서 신심(信心)과 환희심이 일어난다는데도, 휴는 무슨 심뽀인지 그 너머의 어떤 걸 보고 싶었다.
시간 있고 돈 있는 이들 말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어스름 해뜨기 전부터 어스름 해질 때까지 논밭에서 허리 못 펴고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짬 내는 이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말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봤는가?'
본 듯도 하고 못 본 듯도 하다.
'어땠는가?'
사람 사는 세상 아니, 중생들이 사는 세상은 나라와 종교와 상관없이 다 같다는 걸 알았다.
그 나라엔 환속한 승려들이 (거의) 실무자로 있는 '종교성'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가는 모르겠는데) 휴가 가 있던 그때는 종교성 직원들이 지역, 마을 법회(法會) 때마다 법사(法師)들의 법문(法門)을 들으며, 만약 법사가 정치 비판을 하거나 풍자를 하면 경고장을 보내고, 그래도 또 하면 감옥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그때의 사복경찰이나 정보원들처럼.
2007년, 승려들이 발우를 뒤집어 거꾸로 엎어 들고 날마다 쉐다곤에서 슐레 파고다까지 자애경을 읊으며 행진을 하여 '샤프란 데이'로 일컬어지던 그때, 휴도 그곳에 있었다.
어느 날부터 빨간 목도리를 목에 두른 군인들이 총검을 들고 절 숲(?)을 휘젓고 다녔고, 그다음 날은 어김없이 안 좋은 소식이 들렸다.
"저 옆 절 스님들이 오늘 새벽에 끌려갔대."
그리고 일주문 앞 도로에는 짐칸이 철창인 트럭들이 오갔고 가사가 벗겨진 승려들이 깍지 낀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곤봉에 맞으면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철창 트럭에 구겨 넣어지고 있었다.
소문인지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미얀마 승려들 사이에 떠도는 말들 가운데는, 종교성에는 법사는 물론 주지자격의 승려나 사야도(큰스님)들의 허물이 될 만한 것들은 다 꿰고 있고 응당한 자료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몇 년 전, 국정원인지 뭔지에서 '사찰' 어쩌고 저쩌고 했다기에, 세상 물정 어두운 나는 '무슨 절(사찰) 이야기를 저렇게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옛날 안기부와 정보부에서 했던 짓들을 했다는 말이어서 '아직도?' 하고 놀랐고, '인간 세상은 다 같은가 보다.' 생각했더랬다.
휴는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나라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어디에선가 어느 나라에선가는 종교와 정치와 권력이 손잡지 않은 곳도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짐작 추측이 아닌, 아직 희망은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요즘은, 우리나라의 8, 90년 대 또는 미얀마처럼 살벌 엄혹하진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SNS와 유튜브만 열면 얼굴 찌푸려질 온갖 험악한 말과 글들이 날아다니고, 편가르는 글과 (글이라 하기엔 너무 거칠다) 말이 철천지 원수 대하듯 하는 무시무시한, 가시 돋친 말 칼날 같은 글들이 쏟아지는 데도 어디로 끌려가 고문당했거나 실종됐다는 뉴스는 없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험악한 말 편 가르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판은 하되 비난과 거친 욕설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 살벌한 그때에도 하지 않았던 말을 어찌하여 그토록 잔인하리만치 거칠게 내뱉는지..., 부모의 안 좋은 말버릇 몸버릇이 자식에게 대물림되고 있으니 그만 멈추어야 할 일이다.
옛 성현들은 구시화문(口是禍門), 곧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라고 했고, 혀는 복을 찍어 없애는 도끼라 했다.
그러니 내 안의 혀와 입은 내가 먼저 다스려 화(禍)를 불러들이기 전에 복(福)으로 돌려야 한다.
험한 말(글)은 화를 부르고 고운 말(글)은 복을 부르는 일임을 명심 또 명심하여 발전시킨 문명만큼 더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잎새 달 초 엿새 날 아직도 나리시는 단비를 보며 군소리를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