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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를 기억하며

by 애프릭

서울은 지금껏 3명의 앨리스를 만났다. 처음 만난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대부분의 고전 작품이 그러하듯 끝까지 읽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는 토끼와 카드로 만들어진 군대 얘기는 신기했다. 다만 책을 읽으면 의당 교훈을 얻어야 하는 시절이라 누구를 본받고 싶다고 해야 할지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원작의 제목은 <Alice in Wonderland>로 우리말의 소유격이 영어로는 전치사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음으로 만난 앨리스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앨리스다. 1987년 <에일리언>의 시고니 위버로 시작한 여전사 이미지는 2001년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로 이어졌고 2002년 이 영화를 통해 밀라 요보비치에게 계승되었다. 그 후 2016년 <레지던트 이블, 파멸의 날>까지 무려 15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서울에게 판타지를 안겨줬다. 어린 시절 주짓수, 킥복싱, 가라테를 배운 경험으로 여러 액션 장면에서 세련된 동선을 뽐냈다. 영화에 '하자드'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애초 <Biohazard> 게임을 영화한 것으로 Hazard 가 위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세 번째로 만난 앨리스는 스모키 밴드의 <옆집에 사는 앨리스다>. 1976년에 발표된 노래니 훨씬 앞서 만나야 했으나 가사 내용을 이해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노래는 앨리스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커튼을 젖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커다란 리무진이 그녀 집으로 들어서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전하지 못한 심정을 노래에 담았다. 한국에 황순원의 <소나기>가 있다면 영국에 이 팝송이 있다고 할 만큼 첫사랑의 감성이 살아있는 곳이다. 옆집이 Next door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은 네 번째 앨리스를 기다리고 있다. 요즘 다들 회사에서 영어 이름을 쓰니 앨리스를 만날 확률이 있다. 그녀는 회의에 허겁지겁 들어오며 토끼굴에 빠져 늦었다고 할지 모른다.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사내 체육대회를 휩쓸거나, 젊은 남자 직원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고는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는 여인일 수 있다. 아니면 한가로운 주말 오후에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곱게 나이 든 서양 할머니가 자기소개를 하며 이사떡을 건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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