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소파의 주인

by 팔레놉시스

요새도 고모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다. 할머니가 어린 너를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옆에서 ‘정말’이라고 거든다. 농담의 분량이 얄짤없이 편집되려는 순간, 나는 수굿이 답한다. 그건 옛날 얘기죠. 내가 아는 할머니의 친구는 한 명이다. 부산집 할머니. 약수터 어귀에서 도토리 국수를 파셨다. 연도는 모르지만, 눈이 푹푹 내린 어느 겨울날이었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약수터로 놀러간 할머니를 모셔오라고 했다. 새하얀 중절모를 멋지게 눌러쓴 한 무리의 소나무를 구경하며 느릿느릿 부산집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를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할머니와의 첫 대화가 성사된 날, 두툼한 솜이불 위를 걷는 기분이었달까. 젊은 시절, 국밥 장사를 했다는 그는, 배고픈 사람들의 그릇에는 꼭 한 국자를 더했다고 회고했다. 하긴 할머니가 손이 크긴 했다. 회색빛 슬레이트 처마 끝에 고드름이 매달릴 무렵이면, 한 솥 가득 ‘감주’를 만들어서 마루에 내놓곤 했으니까. 식혜를 감주라고도 부르는구나. 그때 알았다. 할머니는 후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금요일엔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갔다. 돌아오는 금요일 밤마다 할머니는, 동생과 나이가 같은 적갈색 소파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렸다. 언제부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을까. 아이처럼 웃는 할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밤 중에 앞다리살을 구워 먹었다. 당신께서 사온 고기를 먹는 손주를 보고 나서야, 할머니는 제 일을 끝낸 사람처럼 방으로 돌아가 불을 껐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좋았다. 의사는 약을 지시하고, 간호사는 약을 썼다. 연거푸 쏟아 부운 승압제가 내리꽂는 혈압을 간신히 지탱했다. 중풍을 두 번이나 맞은 노구는 모래성같이 무너졌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했다. 당신이 좋다고 말하던 나도, 상복을 입은 내 모습을 불경스럽게 그리곤 했으니까. 그런데도 한 사람만이 희미한 숨결을 붙잡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할머니 자신이었다. 나의 할머니,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언론사 작문 시험의 주제어는 ‘여행’이었다. 어떤 여행을 꼽을까, 머릿속에서 지구본을 돌렸다. 유럽의 봄, 미국의 여름, 호주의 겨울. 왁자지껄했던 동남아. 딱 3분을 고민한 끝에 당신을 만나러 가는 여행을 택했다.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10분을 가야하는 곳. 나는 그 여정을 남은 47분 동안 적었다. 할머니는 살아냈다. 대신 거동을 잃었다. 높다란 집을 떠나 인심 넉넉한 요양원으로 간 지는 햇수로 4년이 넘었다. 그곳에서도 할머니는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바쁘다는 핑계는 접어두고, 내일은 가야지. 여행을 떠나야지. 창문 너머로라도 당신을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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