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속에서

날은 밝았습니다

by 팔레놉시스

산맥을 넘은 바람이 내달렸다. 시커멓고, 힘이 셌다. 나는 똑바로 걸을 수 없었다. 소리를 질러야, 한푼짜리 말이 간신히 귀에 닿았다. 고성이 넘나드는 밤, 새끼손톱만한 불똥이 벌떼처럼 날아와 허벅지를 쐈다. 따가웠던가, 쓰렸던가. 씨앗이 발아하는 계절, 고성의 숲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고모는 그날 저녁 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초대가 늦었다. 먼저 ‘잘 지낸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가방을 두고 오겠다는 구실로 고모에게 방 구경을 권했다. ‘잘 지내는구나’라는 말이 돌아왔다. 탈무드는 이렇게 전한다.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짧은 인생, 복수는 무슨. 잘 사는 게, 최고의 보은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바람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피었다. 허탈하고, 무력했다. 제아무리 불자동차라 한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 싶었다. 물통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말못할 심정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돌이켜보니 나만 몰랐고,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은 꼭 사실 같았다. 딸을 빼닮은 손녀손자를 바라보는 고모의 눈빛이 확실한 증거였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소중하고, 내 조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내가 이런데, 할머니가 된 고모는 어떠랴. 나는 행복한 한 식구에게 저녁을 사고 싶었다. 실컷 시킨 뒤 몰래 빠져나와 카드를 긁고 싶었다. 고모는 얼마 시키지도 않고, 배가 부르다고 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누나도 그랬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불의 심장부는 건드리지 않았다. 빨간 소방차들은 일렬로 대로를 채워나가고, 희끗한 머리의 산불 진화대원들은 나란히 멈춰서길 반복했다. 그때의 불은 꺼야하는 게 아니라,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말라붙은 침으로 진분을 삼키고, 검댕을 뒤집어쓰면서도 그들에겐 지키고 싶은 게 있었다. 예전의 고모도 그랬을까. 날이 밝고, 불과 연기가 자취를 감출 무렵 나는 생각했다. 훈련소에 가기 전날, 잠든 고모의 머리맡에 편지 한 장을 남겼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문장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고모, 나는 고모가 슈퍼맨인 줄 알았어요.” 그때도 한참 몰랐다. 우리 가족을 위해 계절을 막론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고모가, 어느 날 갑자기 병상에 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삶에서 언제나 어른이었던 고모에게도, 스물몇 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떠나보낸 첫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이란 두 글자로 밥벌이를 하면서도 코앞의 사실을 몰랐다. 이제는 뼈저리게 안다. 간간이 쓰는 글을 잘 읽고 있노라고, 고모는 말했다. 삐뚤어지지 않아서 고마울 따름이라는 안도 역시 빠지지 않았다. 할 말은 많았는데,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산불의 일생을 지켜본 뒤에야 몇 줄을 적는다. 고맙습니다. 불행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당신이 막았습니다. 시뻘건 불길도, 매캐한 연기도 없습니다. 이제 날은 밝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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