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와 박

초록불빛

by 팔레놉시스

두 사람은 기린중학교 1학년 3반 교실에서 만났다. 강원도의 초봄은 늦겨울과 같은 이름이니, 분명 뿌연 입김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고와 박’은 서로의 앳된 첫 모습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을지. 하긴 나야 서울대병원에서 입학식을 보냈으니 알 방도가 없다. 키가 큰 아이와 키가 작은 아이. 이렇게 눙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들은 연필을 곱게 깎아 바삭한 종이에 써내려가야 하는 두 편의 서정시이니까. 싸이월드와 네이트온을 빼놓고 학창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싸이월드 ‘인탐’이 기억의 빨랫줄에 묵직하게 걸리곤 한다. 일단 인물 탐구를 하려면, 누군가를 오랫동안 응시해야 하고, 그의 좋은 점들을 근면히 골라내야 한다. 그건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인탐의 달인이기도 하다. 내 기억 속의 데면데면했던 두 친구는 스무 살이 되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박이 인제의 한 정비대대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살 때, 고 역시 휴대전화를 붙들고 살았다. 함께 밥벌이의 방식을 고민하고, 답이 없는 연애 상담까지 한다는 말을 오래전에 들었다. 그리도 할 말이 많았을까. 원체 속이 깊은 친구들이니, 아마 서로의 한숨 섞인 고충을 곡진하게 챙겨들었을 것이다. 말 한마디에 위로받고, 온기를 느끼다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순도 높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상 착한 고의 술버릇은 달리기다. 오밤중에 횡단보도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한다. 지치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마냥 해맑다. 어제도 나는 술자리에서 옛 기억을 꺼내며, 고를 놀리기도 했는데, 박은 이제 그만 좀 이야기하라고 웃으며 뜯어말렸다. 언제나 술에 취한 고를 따라다니고, 성질 한번 내지 않았던 이가 바로 박이기 때문이다. 난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박은 우리집에 올 때면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저녁은 드셨는지, 양주를 가져가면 좋아하실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그만큼 아버지도 박을 아낀다. 언제는 한번 박이 값비싼 양주를 가져와 술잔에 따라드렸는데, 이튿날 동네방네 기분 좋게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단다. 당신한테 양주를 몇 잔이고 따라주었다는 너스레였는데, 사실 두 잔밖에 드리지 않았다. 이미 한껏 취해계셨기 때문이다. 고는 우리 엄마의 기일을 꼬박꼬박 챙긴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가. 고의 문자메시지를 보고, 엄마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말못할 부끄러움에 움츠러들었지만, 참 고마웠다. 이태 전 오늘, 인스타그램 글에서 그를 두고 ‘작은 어른’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나의 실책이다. 고는 큰 어른이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한번 사랑을 믿어볼까라는 의지가 생길 때, 나는 주저 않고 나란히 서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다. 나의 피곤함보다 상대의 안색을 유심히 챙기는 게 사랑의 한 모습이라면, 그건 해볼 만한 일이다. 인천에서 속초까지 달려와준 고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나의 사촌동생을 강릉까지 바래다준 박에게 고맙다. 그런데 어제 물어보지 못한 게 있는데, “너넨 그 시절 싸이월드 인탐에 무슨 글을 적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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