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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Feb 20. 2023

가면

사진을 찍고 보면 이게 정말 나야? 흠 칫놀랄 때가 많습니다. 

거울을 보면 분명 나인데, 사진 속 내 모습은 이게 정말 나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괴상한 모습일 때가 종종 있죠. 우리는 혼란스러워집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일까?, 사진 속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일까? 네이버에 검색도 하잖아요. 거울이 진짜예요? 사진이 진짜예요? 거울이든 사진이든 정확하지 않다는 답변을 받고 우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우리가 진짜 궁금한 건 내 모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진실보다,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이 궁금한 거죠. 거울 속 썩 괜찮은 내 모습이 진짜일까?, 사진 속 괴상망측한 내 모습이 진짜일까? 이 고민 속에서 저는 제 자아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살면서 이 질문 한 번쯤은 다들 해보셨을 겁니다. 저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물음을 물어만 왔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진척이 없는데 말이에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음 받은 본래의 형상이라는 게 있죠.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대로 회복되길 원합니다.'라는 기도 하시잖아요?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거기서 선악의 열매를 따먹으므로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저는 기독교에서 가져다주는 죄에 대한 처벌은 번개를 맞는다던가, 불구덩이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물리적인 고통이 아닌, 마음의 병을 앓게 되어 본래의 창조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 생각합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과 사진 속 모습과 타인이 바라보는 모습 속에서 제가 잃어버린 건 '내 모습'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은 타인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울고 싶어도 웃으며, 웃고 싶어도 우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형상이란 것이 저는 저만의 특별함과 빼어난 재능이라 자만했습니다. 아직은 내가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내 진짜 모습을 찾게 된다면 나는 분명 위대하고 대단할 것이라는 상상을 해왔죠. 이러한 내적 교만은 외적인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조직 생활을 하시면서 자만하고 자랑하고 잘난척하는 꼴 뵈기 싫은 사람들 한 둘은 꼭 있으시죠? 그 사람들의 자부심이 무엇입니까? 나는 니들과는 다르다. 나는 잘나고 특별하다는 우월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얄밉게 자기 자랑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과시하지만 저는 그와 반대로 자신을 완벽히 통제하며 특별함을 과시해 왔습니다. 우월감을 자랑하는 행동으로는 절대 존경받지도 칭찬받지도 못하며 더욱 자신을 실추시킨다는 것을 빠른 나이에 알아버렸죠. 저는 감정을 통제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성인군자가 되고 싶었죠. 유치하고 장난스러운 것을 멀리하고 심각하고 진지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섣불리 도전하고 부딪히는 삶을 포기하고 옳고 그름의 잣대로 돌다리를 두들기며 강을 건너기를 주저했습니다. 


제 마음속에도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질투하고, 소외되었다는 분노와 서운한 감정이 모두 있는데 말이에요. 저는 일반 사람들보다 감정에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부정하고 살아가기란 제게 주어진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가면을 쓰지 않고 참된 나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보통 가면을 쓴 채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과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는 사람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서도 가면을 쓴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죠. 가면을 벗는 일은 당장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강남 한복판에 나가는 것만큼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가면을 쓰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이것을 벗어던지는 일은 곳 타인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저들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죠. 저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 가면을 쓰고 살아오며 느낀 건 외로움입니다. 누군가를 신뢰할 수도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건 나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나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이면 과감히 내 울타리 밖으로 내쳐야겠죠. 그건 나의 '일부분을' 사랑한 사람이지 나를 사랑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을 지운 여자친구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다면 여러분은 여자친구의 '화장한 모습'을 사랑한 것이지 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닌 겁니다. 


저도 가면을 잠깐 벗어보았지만 그 삶은 정말이지 고통스럽습니다. 항상 온화하고 웃고 있던 얼굴에 짜증 나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타인들은 즉각 반응하죠. 제 왜 저러나?, 무슨 일 있나?,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그런 반응이 느껴질수록 누군가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고, 나를 기피하는 것 같이 느껴져 피해의식이 생깁니다. 한편으로는 나로 인해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는 내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도 못하나? 화도 납니다. 타인들의 시선과 반응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생기죠. 실상은 내가 내 이미지를 망치기 싫어서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것인데 말이에요. 나는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내면 안 되고, 항상 웃어야 하며, 누군가를 시기해서도 안되고 늘 배려해야 된다는 이미지를 버리기 싫은 것입니다. 저와 같은 증상의 수준까지 올라오면 기도도 하기 싫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며 그 모습마저 사랑하신다는데 그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죠. 저는 죄가 없고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았고, 처음 성경을 읽을 적 오만했습니다. 항상 배려하고 양보하고 헌신하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에 말씀을 잘 이행했다고 믿었죠. 구원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는 교리적인 믿음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말씀대로 살아왔으니 문제없다며 나의 죄를 외면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를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이 있었고, 나를 숨기는 일은 타인에게 더욱 헌신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 저도 인간이기에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 뒤에는 무언가를 바라는 심리가 숨어있었죠.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에 사랑을 주었습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랑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게 되더군요. 사랑을 준 만큼 돌아오지 않을 경우 실망하게 되고,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면 서운하고 질투하게 되고, 외로운 나 자신을 내가 위로해 줄 수 없고 누군가와의 절대적 이해관계 안에서 위로받고 싶었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7년 정도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집에서만 있을 때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외로움이란 소속된 곳에서 동 떨어진 느낌을 받을 때 오더군요. 나만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고 소외되었다는 피해의식에서 파생된 다는 걸 느끼는 중이죠. 집에서 혼자 있을 때 느끼는 허전함은 빠르게 털어버리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회복해야 되겠지만, 소속된 곳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은 내가 부여잡고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군요. 이 외로움이 저의 허물을 벗겨주던가, 자립과 독립을 할 수 있는 성숙함을 선물해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찾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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