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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관복 Aug 05. 2023

綠山

5. 남에서 온 사람

아마 늦은 가을이었던 것 같다. 내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그 남자를 만났으니까.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거리는 왁자지껄 장 보러 나온 사람들, 저녁 먹으러 나온 사람들,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남편으로부터 지나치다 할 정도의 주의를 받고 단동시내중심에 있는 乐购(한국의 홈플러스 와 같은 대형쇼핑몰) 정문 앞의 분주한 사람들 틈에 섞여 트렌치코트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오른손으로 주머니 안의 휴대폰을 꼼지락거리며 쥐고 서있었다. 

남편에게 도착했다고 전화했다. 집에 있던 남편은 알았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남편이 그 남자에게 전화했다. 녹색 스카프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인이 보이냐고.

오십 대 초반쯤 보이는 중키의, 눈은 가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어떤 남자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내 앞 삼 미터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내리더니 나에게로 다가왔다.


장선생님 부인되십니까?

네 김ㅇㅇ선생님이십니까?


주위의 요란한 음악소리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저쪽으로. 


그 남자의 뒤를 따라 거리를 조금 걸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입고 있는 검은색계열의 잠바 앞섶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장선생에게 드리면 아십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그 남자가 머리를 약간 숙였다.

나는 봉투를 받아 어깨에 걸쳤던 핸드백에 넣으며 마주 목례를 했다.

그 남자는 다시 명함을 한 장 건네며 말했다.


여기서 묵고 있습니다.     


돌아와 남편에게 봉투를 건네며 뭐냐고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6.25 때 엄마 등에 업혀 남으로 내려간 실향민인데 고향이 신의주 어디라고 했다.

38선을 넘을 때 갓 스물이었던 그 남자의 고모가 고향에 남겨졌던 친오빠를 찾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 남자에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분을 애타게 찾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토록 주의를 당부했던 것이었다.

남한사람과의 접촉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이유 불문 간첩으로 몰려 잡혀갈 수 있었으니까.

그 남자가 건넨 봉투에 백 달러지폐 몇 십장과 오래된 흑백가족사진, 그리고 옛 고향의 주소가 적힌 메모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남편을 어찌 알고 연락이 닿아 이런  것들을 전해 주었을까?     

우리 가족이 단동에 거주하면서 현지인들을 통해 알게 된 조선족 친구가 여럿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단동과 선양을 오고 가며 그들과 어울려 식사도 같이 많이 했고 가라오케장에서도 신나게 노래하며 놀았고 어떤 청명한 날씨 때에는 편을 갈라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시합도 하며 즐겁게 지내오고 있었다.

그들 중 남한으로 오가며 곡물장사 등을 하며 사업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남편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남편은 여러 번 거절했다.

계속 간곡히 도와주십사 청이 들어왔다. 남편의 정의로운 성격상 외면할 수 없었다. 최대한 조심하여 알아보겠노라고 했단다.

단동에 거주하는 주재원들은 선양에 있는 북조선영사관에서 한 달에 네 차례 신의주를 오고 갈 수 있는 도강증을 발급받아 자유로이 압록강을 넘나들 수 있었다. 강 건너 쪽의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앞 뒤 잘라먹고 이런 사람 좀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일쯤 지나 소식이 왔다. 찾았다고.

남편이 직접 건너갔다. 그러나 찾아가지는 않았다. 믿음직한 지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찾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인도 이미 없고 아들과 손자들이 양철지붕을 한 어떤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단다.

그 자녀들에게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했고 여러 가지 소상한 이야기들을 들었고 몇 장의 가족사진을 받았다. 믿음직한 지인은 그 사진들을 챙기고 아버지의 가족들이 주는 것이라며 달러지폐를 건네주고 돌아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들로서는 거액의 돈을 받고 황공해하던 중년의 아들과 더벅머리 손자들의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려주었단다.     

단동에 머물던 그 남자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진들을 간수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한 달 뒤.

그 남자는 고모와 부인을 대동하고 다시 단동에 날아왔다.

너무 간절히 간청하여 단동시내의 어느 생선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우리 가족과 식사자리를 가졌다.

나는 너무 긴장하였다. 처음 이렇게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앉아 말도 섞고 밥도 같이 먹는 남쪽 사람들이었다.

단동에 와서 살면서 남한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상점에서 밥도 먹어보고 물건도 많이 사보았지만 특별히 가까이하지는 않았고 그냥 들며 나며 인사하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엄청 상냥했고 북쪽 사람이라고 해서 신기해하지도 않았고 그냥 같은 동네 이웃끼리라는 그런 평범한 태도들이었다.     

그 남자의 가족도 그냥 그런 감정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었다. 세 사람 다 아주 소박해 보였다.


여기는 서민들이 많이 찾는 식당인가요? 우리 가족은 그런 곳이 좋습니다.

예. 음식  맛은 깔끔합니다.     


고모를 위해 압록강이 보이는 호텔에 안내하여 여장을 풀게 했다.

객실에 같이 올라가 차 한 잔 같이 마시며 다 같이 압록강을 바라보았다.

고모가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냥 창 너머 강만 바라보고 앉았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아마 6.25 때 고모의 나이가 스물이었다니 1930년생이라면 나의 시아버님과 같은 나이쯤 되었을 거라고 혼자 속으로 셈해보았다.

그 당시 그 남자는 갓난쟁이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고모는 평생을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있는 오빠를 생각했다고 한다. 

단동에 머물었던 그 나날동안 압록강 건너 신의주 땅을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을까. 

그 당시 아무 때고 강을 건너 평양에 갈 수 있었던 나에게 그 세 가족이 너무 안쓰럽게 보여 그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와줄게 더는 없기도 하였고  강 건너 고향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들은 서울로 돌아갔다.     


그 후 세 번쯤 그 남자는 혼자서 단동을 방문하기도 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차린 식사도 같이 하면서 남과 북의 사람들로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그 남자를 처음 만난 지 이 년쯤 지나 우리 가족이 서울에 오고 나서 여러 과정들을 거쳐 정착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가지고 있던 휴대폰번호로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남한사람에게 전화했었다.     


장입니다. 김ㅇㅇ선생님.

아니 누구시라고요? 장선생님 서울에 행사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왔습니다. 선생님 네처럼 월남했지요.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그 남자는 정신을 수습하고 그제야      


아. 그렇게 됐군요. 일간 찾아뵙겠습니다.     


알고 보니 강남에 70년대에 직접 지었다는 5층짜리 건물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그 남자의 이복형님이 땅을 사서 지었는데 나중에 캐나다로 이민 가면서 동생에게 물려주고 갔다고 한다. 무슨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 땅에 건물을 지은건 아니라고 했다. 

한때 내 남편이 무슨 조그만 사업장을 내오고 싶어 할 때 선뜻 건물 옥탑 방을 무상으로 내어주었었다.     


근간에 그 남자의 부인이 전화를 해와 고모와 남편의 근황을 알려주었고 나는 남편의 부재를 이야기했다. 둘 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평생 독신으로 남대문시장에서 억척같이 가게를 운영해 자수성가 한 고모님은 지금 어느 좋은 요양원에 모시고 있는데 아직 정정하시고 남편은 폐암진단으로 한동안 고생했는데 지금 좀 괜찮다고 했다. 경상도사투리의 그 부인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처음 만난 지 20년이 되어 옴을 셈하고 있었다.

태어날 아기와 또 아들부부와 함께 잘 살아지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부인과 통화하면서 속절없는 세월의 무심함과 이제는 혼자된 내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의 형제들을 생각했고 압록강가의 호텔창가에서 다 같이 침묵으로 바라보던 신의주 땅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한반도의 억지의 비극은 언제나 끝나게 될 것인가.


2023년 8월 4일 신관복 무더운 여름의 어느 주말에 쓰다. 

시골집 정원에 핀 소담한 목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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