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의 여름
몇 년 전, 육 년 전인가 서울서 회사근무 할 때 바로 코앞에 자그마한 화원이 있었는데 컴퓨터만 들여다보다 바람 쏘이고 싶으면 가끔 내려와 화초들을 둘러보며 눈과 마음을 쉬이 군 했었다. 3월 중순이 지날 무렵엔 가지각색의 수국화분들을 좁은 안쪽으로 들여가지 못하고 화원 문 앞에 줄느런히 놓고 판매하군 했는데 소녀시절부터 꽃 중에 수국을 제일로 좋아하는 터라 오늘은 청수국, 내일은 핑크수국, 또 다음날은 하얀 수국 이렇게 사들고 퇴근하다 나니 가지각색 수국으로 집 베란다가 환해졌었다. 그러나 덜컥 이 화초들을 들이고 들인 다음의 관리가 문제였다. 수국이라고 물을 너무 많이 줘도 과습으로 안 되고 너무 적게 줘도 안 되는 이 식물을 꽃을 실컷 보고 나서 장마철에 시골집 내려오면서 모두 데리고 내려와 살짝 소나무의 그늘이 있는 정원의 가장자리에 심어놓고 올라왔었다.
주말마다 보는 이 애들은 땅의 기운을 받았는지 무탈하게 잘도 자라면서 몸집을 엄청 키웠는데 인터넷으로 부지런히 수국 키우기를 검색하면서 가을까지 잘 키웠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이 접어들면서 올해에 맺힌 꽃눈을 겨울에 잘 보존해서 얼지 않게 해야 다음 해 봄에 순이 돋아나 여름에 꽃이 핀다는 인터넷의 설명에 가랑잎을 긁어 푹 덮어주고, 남편이 수국 주변으로 네모의 쬐꼬만 하우스틀을 만들어 설치하고 아예 비닐을 씌우고 또 그 위에 화물차 적재함에 씌우려고 사두었던 차광막까지 덧 씌어주고 올라왔었다.
봄이 왔어도 산골마을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4월 중순경에 덮개들을 벗기고 개방을 했는데 헉 뿌리 안쪽에서 싹이 올라오다가 햇빛을 못 봐서 썩어가고 또 가지들에 곰팡이가 피어있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보름정도 지나서부터는 온전한 새싹이 올라오고 곰팡이 피었던 가지들에도 한두 개 꽃눈이 살아서 움을 틔우고 하면서 자라더니 여름이 되면서 가지 끝에 꽃망울을 맺어 참으로 더디게 서서히 꽃을 피웠다. 약간 보랏빛의 청수국이었다. 그해 여름 그 몇 송이의 수국꽃은 시골집에 올 때마다 나에게 선한 미소를 주었고 뿌연 도시생활에서의 탈출의 실감을 안겨주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마다 수국의 꽃눈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아예 11월에 수국을 화분에 옮겨 집안으로 들이기까지에 이르렀다. 커다란 화분임에도 캐낸 뿌리가 그 안에 담기기 벅찼다. 땅속으로 내뻗은 뿌리는 실하고 무수했다. 3월이 되니 이 애들이 어떻게 봄이 왔는지 알았는지 가지마다의 꽃눈이 움터 승벽내기로 파란 줄기를 내 뻗기 시작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화분에 심긴 상태에서 연약한 꽃을 피울 가 겁이 나 서둘러 낑낑 밖으로 내다 정원의 그 자리에 정성껏 심었는데 수국을 시골집에 옮겨 심어 꽃을 보던 중 그 여름에 가장 많이, 가장 색색이 예쁘게 피어 볼 때마다 꽃을 못 보고 떠난 이를 떠올리게 하고 코등이 새큰한 미소를 짓게 하였다.
큰 소가 나가면 작은 소가 큰 소 노릇한다고 남편이 도맡아 하던 시골집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해보려고 노력하고 또 어중간이 해 나가는데 일머리가 서툴러 한 시간가량 하면 될 일도 두 시간을 소비하고 또 온통 입은 옷을 흙탕으로 만들든가, 암튼 옆에서 누가 보면 가관일 듯싶다.
정원 앞 테라스에 페인트칠을 한지 두 해가 지나 언제부터 벼루고 있다가 보일러실에 뒹굴고 있는 빈 페인트 통을 찾아내어 그것과 똑같은 것을 인터넷으로 세 통 구매하여 드디어 어느 주말 완전 무장을 하고 페인트칠을 시작하였다. 통 뚜껑을 개봉하고 작은 그릇에 주르르 쏟아 계단부터 칠하기 시작하는데 헉, 무슨 색깔이 시커멓고 윤기만 나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덜컥 페인트를 잘 못 구입 했구나 시작했는데 할 수 없지, 부지런히 쏟아놓은걸 다 바르고 또 쏟아서 바르고 하기를 세 번째, 아니 이게 웬일이지, 테라스 색깔과 비슷한 색상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 처음부터 저어서 쏟았어야 했다. 부리나케 보일러실로 달려가 물건들을 스캔하다 옳거니, 웬 흰 호수 같은 것에 페인트색갈이 묻어있는 걸 발견하고 이것으로 저어서 칠 하군 했군, 당장에 가지고 나와 힘 있게 저어서 조금씩 쏟아 처음부터 다시 칠을 시작했다.
앞쪽 테라스를 다 끝내고 나니 입은 옷은 온통 페인트칠로 물들었고 거추장스러워 작업신발을 벗어던지고 앉아 뭉갰더니 양말바닥을 뚫고 스며든 페인트가 발바닥에도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승리자의 미소를 지우며 사진을 찍어 아들며느리와 친근한 지인들에게 여봐란듯이 보내고 칭찬과 탄성을 기다렸다.
지난 주말에는 정원 앞 철쭉들이 꽃이 피고 난 후 너무 웃자라 테라스를 넘어 들어 올 기세이기에 난생처음 전지가위를 들고 그 애들을 가지런히 해주었다. 너무 힘을 주어 전지가위를 사용했더니 반도 못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래도 계속하다나니 저절로 가위질이 몸에 붙어서 그런대로 앞쪽만은 끝내버렸다.
잠시 쉬려고 집에 들어와 물 한잔 마시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부재중 전화가 두통이나 떠있었다. 뒤쪽 언덕배기의 영자언니가 아침에 한번, 점심 즈음에 한번, 두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아 혼자 있는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스러워 내려오려던 참이라고 하며 전지가위로 밖에 나와 일하고 있다고 하니 참 대단타고 나를 추켜세웠다. 칭찬을 받으니 으쓱해져 이제 내가 해보지 않은 다른 일거리도 우습게 할 것 같은 자신심이 슬슬 온몸을 감돈다.
그러나 작년에 전지를 해준 소나무들이 여러 그루 누렇게 되어가고 있어 살아나길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젠 안 되겠다 싶어 잘라주려고 톱을 들고나가 기세 좋게 몇 번 톱질을 해보다가 아, 이건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를 연발하며 아무래도 정원사아저씨의 도움을 받아야 할 가부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신 김에 정원의 잔디도 한번 깎아 주십사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전원의 여름은 할 것투성이, 그리고 또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잡초와의 대결의 계절이다, 나중엔 내 쪽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지만.
책을 읽거나, 어쩌다 글을 쓰다가 앞쪽 테라스에 나가 바라본 서쪽하늘이 저녁 8시가 다 되어 오는 것 같은데 석양을 머금은 조각조각 구름을 띄우고 아름답다.
며칠 전 이틀 내리 내린 장대비로 집 옆 하천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테라스에 서서 내려다본 정원의 수국이 올해에는 꽃이 피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생긴 꽃눈이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에 다 얼어버렸으니까. 깻잎 같은 이파리만 녹색으로 짙푸르다. 그러나 정원 양옆의 보초처럼 늠름히 서있는 목수국은 벌써 가지마다 녹색의 꽃망울을 매달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그 녹색의 꽃망울들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주먹만큼씩 한 하얀 꽃 덩어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여름 내내 내게 선한 미소를 선사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수국의 계절이다.
2023년 7월 2일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신관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