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단오날에
우리 시골집 뒤 산은 소나무 숲으로 빼곡해서 사시장철 푸름을 자랑하는 장한 산이다.
완만한 산등성이는 우리 집 뒤쪽에서부터 동서 쪽으로 천천히 경사를 이루며 드문드문 서있는 아담한 주택들을 막아서듯 감싸며 마을 한복판으로 뻗어 내렸고 또 다른 산줄기는 반대쪽 방향으로 흘러내려 양팔 벌린 어머니의 품속 안에 내 집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정원에 서서나 집 이층 테라스에 서서나 이 뒤 산을 바라보는 것을 너무 좋아했는데 보름이면 환하고 둥근달이 이 뒤 산에서 불쑥 솟아올랐고 바라볼 때마다 저 산꼭대기 등성이 따라 기다란 길이 있을까, 그리고 산 정상에 오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언제쯤 오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도 했었는데 드디어 어느 겨울 성탄절에 남편과 함께 겨울 숲을 뚫고 산 정상에 올랐다. 인적이 없어서 고라니 같은 산동물들이 다닌다(남편의 설명)는 길 아닌 길을 따라 맞잡아주는 남편의 손을 잡아당기며 두 시간가량 헉헉거린 끝에 정말로 넓은 공지가 있는 산 정상에 올랐는데 등성이를 따라 길이 있었고 산 정상에 서서 내려다본 우리 하얀 시골집은 아득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산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길 섶에 하나 둘 점점이 집들이 들어앉아 있어 마을 전체가 산속에 폭 잠겨있었다.
하산할 때에는 등성이 그 길을 따라 내려오지 않고 앞장서 나를 끌고 가는 남편에게 매달려 경사가 가파른 산 가운데의, 장마 때면 빗물이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위험천만한 곡예를 하며 무서움에 울상이 되어 소리소리 지르며 산속의 어느 외딴집 근처까지 그야말로 굴러 내려왔다. 그래도 집에 도착해서는 드디어 저 뒤 산에 올라가 보았다는 정복자의 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너무 기분이 좋았고 그 아찔했던 등산길은 사철 푸른 산을 바라볼 때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에 자리 잡았다.
영월은 유난히 소나무가 많은 고장인 것 같다.
아침 출근길마다 꾸불꾸불 꼬불꼬불 산길을 톺아 올라 이 고장의 일출장소로 유명한 수라리재를 덜컹거리는 작은 시골버스를 타고 넘어가는데 해발 600 고지의 그 일출장소에 도달하여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광경은 장관이다. 층층이 허리에 구름을 감싼 겹겹의 산산 사이로 보이는 국도는 기다란 뱀처럼 보인다. 그 겹겹의 산들은 소나무가 군락으로 자리하고 있어 과연 소나무의 고장이라 할만하다.
시골집으로 오는 고속도로와 국도 위에서 산이 많고 또 소나무가 많은 이 고장의 곳곳의 지명은 무슨 재가 셀 수 없이 많아 처음엔 시골스럽더니 지금은 그 재 이름들이 옛스러워서 정답고 푸근하다.
와석재, 봉우재, 솔치재, 소나기재, 덧재, 수라리재.......
2015년엔 집만 덩그렇게 서있고 정원수나 유실수 같은 나무는 하나도 심겨 있지 않아서 남편은 소나무가 많은 이 고장의 산에서 마을지인이 가꾼 손가락 같은 아기 소나무들을 얻어다 집둘레 빙 돌아가며 심었는데 6년 정도 지나니 너무 잘 자라고 커져서 집이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들어앉은 형국을 하게 되었다.
작년 오월에 정원사를 수소문하여 그 소나무들을 가지치기를 하여 이발한 것처럼 시원하게 모양을 만들었는데 지난 겨울 대여섯 그루가 너무 앙상하게 모양을 낸 탓인지 안타깝게 얼어 죽었다. 지독한 이 고장의 겨울추위에도 끄떡없이 푸르게 서있던 그 소나무들이 멋을 좀 내주었더니 사람이 보기 좋으라는 멋은 나무들의 생리와 맞지 않는다는 듯 유월인 지금도 누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그러나 잘 다듬어 진채로 겨울을 이겨내고 억세게 푸른 가지를 펼치고 있는 장한 소나무들이 대부분이어서 또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나는 바깥등을 켜고 밖으로 나와 굵고 커진 정원의 소나무들을 하나씩 안아주며 나무기둥에 얼굴을 기대고 눈감고 말한다.
나무야 나무야 고마워, 사랑해,
나무를 안고 소나무처럼 춘하추동 푸르른 마음으로 억세게 살아가게 해 주십사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신께 빌고 또 빌 군 한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어스름이 서서히 내리는 지금 어느 해 겨울 끝에 남편과 올랐던 푸른 뒤 산이 보고 싶어 2층 테라스로 나갔는데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무거운 구름이 콱 내려앉아 뒤 산을 삼켜버려 아예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며 단오명절이라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 떡메 들고 떡 치고, 숯불 피어 고기 굽고, 먹고 마시며 1차, 2차로 떠들썩했던 시골마을이 뿌연 구름 속에 잠겨 아스라이 잠 잘 채비하며 밤으로 가고 있다.
푸르름의 계절, 비의 계절이다.
2023년 단오날에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