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록산무역
2014년 4월 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고 구명선총사장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생전 그의 마지막 지위는 인민보안성 무역국 국장이었다.
인민보안성 무역국의 대외명칭은 록산무역회사였다. 인민보안성은 한국에서는 경찰청과 같은 국가기관이었다.
이 인민보안성 무역국은 대내외적으로 외화를 벌어 성에 필요한 물자조달과 위로부터 할당된 외화와 물품들을 보장하는 공인된 외화벌이 회사였다.
무역국에 소속된 공직간부들은 각자 계급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록산무역은 전국각지에 록산의 명칭을 가진 지사들을 두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평양록산, 남포록산, 신의주록산, 원산록산 등이었다.
회사의 중추적 역할은 당연히 평양록산이 도맡아 하였는데 평양록산은 국내에서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는 북한에서 해외로부터의 중고차수입을 독점하고 있었다.
1997년부터 국가의 공식허가를 받아 가까운 이웃나라인 일본산 중고차를 대대적으로 수입하여 전국의 국가성기관들과 대소규모 회사들과 공장기업소, 심지어 협동농장들에까지 달러로 되팔아 어마어마한 이익을 창출하였으며 이렇게 걷어들인 외화로 백화점을 짓고, 호화식당을 개업하였으며 아파트건설에도 투자하면서 평양의 락랑구역 통일거리에 번듯한 새 사옥을 지으며 승승장구하였다.
모모한 사람들끼리 모인 술자리나 모임에서 공공연히 구명선총사장은 평양의 정주영 회장으로 회자되곤 했다.
함경남도 명천에서 태어났으며 군운전병출신인 구총사장의 학력은 고졸이 전부였지만 정치와 돈을 적절히 주무룰줄 알았으며 휘하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으로 너그러웠고 업무적으로는 칼날 같았다.
고졸학력인 구총사장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첨단기술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대졸인재에 목말라했는데 1998년 가을 운 좋게 내 남편이 여러 사람 건너 건너 그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평양ㅇㅇ공대 정보공학부 공정자동화학과 박사원까지 이수한 내 남편이 현직이었던 ㅇㅇ과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는 도저히 부모님과 나와 아들, 그리고 남동생네까지 같이 사는 대식구였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어 뛰어든 일본산 중고자동차 엔진시스템의 재정비 기술(자동차의 Auto-transmission과 각종 Electronic control 계통 및 ECU를 수리 및 개조)이 총사장과 이어준 고마운 끈이었다.
당시 평양록산의 차고에는 첨단기술로 장비된 엔진과 기타 시스템들의 고장퇴치를 못해 팔리지 않는 중고차 60여 대가 있었는데 남편은 시범적으로 노동자 두 사람을 데리고 단 이틀 동안에 여러 대의 자동차를 완전무결하게 재정비하여 총 사장과 회사 현직원들의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공대출신이었던 남편과 내가 평양의 상위 0.01%에게만 주어진다는 해외지사 발령의 꿈을 꾸게 한 초석이었다.
그때로부터 한미한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내 남편은 평양제일의 무역회사에 본사 종합과장으로 스카우트되었고 그로 인해 내 가족의 먹고사는 생활은 윤택해졌고 우리 부부는 더 높은 곳을 꿈꾸고 지향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구명선총사장의 안목에 내 남편이 운 좋게 걸려든 것 같은데 그만큼 평양의 중심은 여러 사람 건너 건너 다 지인일 정도로 좁았다.
남편은 이때의 스카우트과정에 대해 내 아들에게 두고두고 하는 가훈이 있었는데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만 행운이 온다"라는 말이었다.
남편은 대학졸업학년부터 일본자동차에 관련된 서적들을 보기 위해 일본어를 자습했는데 1940년대(일제강점기) 학생신분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많은 지도를 받으며 필요한 원서들을 번역해서 원하는 기술을 습득했었다.
평양과 지방에 일본산 중고차들이 팔려나가고 해가 지나면서부터 차부품문제가 떠올랐다. 회사는 비싼 일본차부품들을 구입할 수가 없어서 대체가능한 중국산 차부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매번 남편이 현지출장을 오고 가면서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는데 한계가 오자 압록강 건너 국경도시 단동에 아예 지사를 내오고 지사장을 파견하는데 이르렀다.
평양록산의 발전흐름에 휘말려 남편과 그 가족인 나와 아들이 순풍에 돛 단 배를 타고 중국의 소도시에 닻을 내리고 해외주재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는 중고차나 부품구입, 그리고 각종 건설자재 수입에 필요한 자금을 석탄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해상운임 비용이 만만치 않고 해상 화물선도 이배, 저배, 화물선주에 따라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자 아예 화물선 배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배를 사기 위해 남편은 차대표와 함께 그 넓은 온 중국땅을 끊임없이 배행기를 타고 내리며 돌아다녔다. 하도 비행기를 많이 타니 겁이 많은 차대표는 탑승전 항상 100위안 지폐 한 장을 비행장 어디 으슥한 곳에 고수레하군 했고 남편은 그 고수레한 지폐를 도로 집어서 출장비에 보탰다고 식사모임 자리에서 우수개소리로 말하곤 했다.
배를 사자마자 구총사장은 옌타이에 지사를 하나 더 내오고 단동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던 차대표와 그의 가족을 옌타이로 옮겨버렸다.
남포항에서 적재하고 중국 산둥반도로 수출되는 석탄의 수출대금 관리와 매입한 화물배의 운행관리를 맡아보는 옌타이 지사장으로 옮겨간 차대표와 그의 가족의 해외생활은 호화로웠고 화려해 보였지만 이미 그때부터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음을 그땐 그 누구도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단동지사장으로 남은 남편은 회사의 차부품과 요청하는 각종 생활물품들을 구입하여 압록강철교건너로 끊임없이 보냈으며 우리 가족은 구총사장과 회사의 출장인원들이 오고 갈 때마다 현지에서 그들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별다를 거 없는 평온한 일상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내 아들은 크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니?라는 질문에 항상, 지금도 단동시절이었다고 주저 없이 대답하곤 한다.
평온했던 해외생활도 3년 차가 접어들면서 나는 남편과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가끔씩 불안했고 애써 그 불안을 부인하면서 평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평양으로 돌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외주재원시절 내내 남편과 나는 마지막날까지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했고 단동대표부 내에서도 우리가 단동을 떠난 후 이 가족이 왜, 무엇 때문에 제3 국으로 갔을까? 모든 대표들이 의아해했고 이해불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깨끗하게 떠났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한국에 온 후 일 년 후 지인을 통해 들었다. 구총사장과 평양록산의 상황에 대해서도 그때부터 종종 듣곤 했다.
남편과 나는 구총사장에게 너무도 미안했고 여기 온 이후 내내 그의 승승장구가 계속되기만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영원한 권력은 없고, 권력의 힘을 빌어 쉽게 벌어들인 돈은 내 돈이 아니고 물거품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인 것은 우리가 떠난 후 7년이 되는 2013년 겨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반종파사건이 벌어지면서 여과 없이 증명되었다.
차대표와 회사 내 중견간부들 모두 이 사건에 여지없이 휘말려 피해 갈 수 없는 불가피한 운명들이었다.
남편도 평양으로 돌아갔으면 그 운명을 면치 못했으리라는 섬뜩한 생각이 한동안 내 머릿속에 지속되었었다.
그리고 비명에 간 구총사장과 그의 휘하 사람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 그들의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2023년 5월 29일 신관복 쓰다.
더 씀
브런치스토리의 짧은 공간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데 독자들의 지루함을 생각하면서 못다 한 이야기는 또 속편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항상 나의 형편없고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시는 구독자님들과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어떻게 하면 잘 읽히고 재미있는 글을 써서 올릴까 고민하면서 이 사람 오늘도 이렇게 글을 써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