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봄나물

향긋한 계절

by 신관복

5월이다.

시골집의 삽화에서 그렸던 그림들이 내 집 정원과 앞산에, 그리고 온 산천에 시나브로, 시나브로 그려지며 완성되고 있다.

도톰한 햇살과 그 빛과 알맞추 내리는 비와 싱그러운 바람은 어우러지고 버무려져 이 자연의 화폭을 완성하면서 뭇새들을 깃들이고, 걷거나 기어 다니는 온갖 생것들에게 포근한 안식처를 내어준다.

정원의 꽃들은 정확이 정해진 순서에 맞춰 차례로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몇 해 동안 이 차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열매를 맺어 먼저 익는 그 순서라고 무릎을 탁 치며 깨달았는데 이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이 너무 신통해서 마음이 뿌듯해졌었다.

우리 집 과일나무꽃이 피는 순서를 말하면

매화꽃(매실나무), 자두꽃, 백도복숭아꽃, 황도복숭아꽃, 배꽃, 사과꽃(부사) 순서인데 어떤 사과농장을 지날 때 홍로사과꽃이 하얗게 먼저 피고, 부사사과꽃이 우리 집 정원 사과꽃과 같은 시기에 뒤늦게 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이른 추석에 홍로가 먼저 나오고 10월 말~11월 초에 서리가 내리면서 부사가 나오니 꽃이 피는 순서가 얼마나 정확한지 나무들의 지혜로움과 기특함을 보면서 머리가 빙 돌 지경이었다.


KakaoTalk_20230511_212624191_05.jpg


나는 매일 저녁 퇴근길에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과나무밭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작약이니, 매발톱이니, 수염패랭이니, 백합이니, 그리고 구절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그것들의 하루하루의 다름이 약동하며 내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빠르게 온몸에 불어넣는 생기를 느끼곤 한다.

내가 제일 재밌게 들여다보는 작약은 땅을 툭 올려 밀면서 붓대처럼 불쑥 올라온다. 백합도 처음 고개를 내밀었을 때의 모양이 붓대는 붓대인데 점점 두꺼워지면서 살짝 징그러운 그 무엇을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변하면서 성장한다.

작년 가을 끝에 처음 모종으로 심어놓은 매발톱은 겨울에 낙엽을 듬뿍 덮어놓았었는데 그 낙엽을 뚫고 갸웃 히 파란 이파리를 내밀어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나왔었다.

수염패랭이는 겨우내 누렇게 죽은 듯 누워있다가도 봄이 오는가 싶으면 부지런히 새 줄기와 잎을 자래워 항상 존재감이 없다가도 문득 마주치면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하고 나의 인정을 받는 꽃이다.

작년 가을 끝무렵부터 올봄 4월까지 꽃눈이 얼지 말라고 부지런히 씌우개를 덮었다 벗겼다를 반복했건만 이젠 7년 된 원예수국이 끝내 밑동에서부터 줄기를 피어 올린다. 움이 기어이 트지 않는 그 가지들의 거무스레한 눈을 매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젠 마음을 접었다. 월동이 성공하지 못한 수국이다.

정원 양편에 보초처럼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목수국은 마음 편하게 모든 가지의 눈이 움트고 연록의 잎을 매달고 있는 중이다. 7월이면 주렁주렁 두 주먹만큼씩이나 크고 하얀 꽃을 피워 길 건너 오가는 마을 어르신들의 기쁨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월동하는 꽃나무들과 화초들을 좋아하는 것은 비단 새봄이 오면 꽃씨를 뿌리거나 꽃모종을 심어 새로이 정원과 꽃밭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이유도 있지만 이 애들이 매서운 우리 시골고장의 추위를 거뜬히 이겨내고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만들어가는 그 강인한 생활력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그 애들의 하루하루의 커감이 내가 더불어 살아가는 원초적인 힘이 되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온 정원을 빙 둘러싸고 있고, 사과나무밭과 꾸지뽕나무밭 사이에 보기 좋게 놓여있는 자연석 사이사이에 우르르 뿌리내린 진한 핑크철쭉과 하얀 흰 철쭉나무는 그야말로 나의 사랑이다.

올봄의 철쭉은 예년에 없이 화려하게 정원을 장식하고 있어 정원의 잔디밭가운데에 서있을 때와 출퇴근길 하천 저쪽 건너편에서 바라다보는 나의 집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는 듯하다.

KakaoTalk_20230511_212624191_04.jpg



꽃들만 앞다투어 피어나는 줄 알았는데 뒤쪽 언덕배기집의 영자언니가 구메구메 데쳐서까지 꿍쳐주는 봄나물꾸러미를 받아 무쳐먹으면서야 얘네들도 예서 제서 지천으로 돋아나오고 있는지를 알았다.

어느 날 푸근한 저녁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시골길을 걸어 들어오고 있는데 어수리나물로 부침개를 부쳐먹고 있다고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로 올라와 같이 먹자고 영자언니가 전화를 해왔다.

프라이팬에 생어수리나물과 갓 돋아난 부추를 깔고 후룩후룩하게 풀어놓은 부침반죽물을 살짝살짝 얇게 그 위에 뿌려가며 부치는 어수리부추 부침개는 알싸름한 향내가 나면서도 처음 맛보는 환상의 맛이었다.

영자언니가 부지런히 부추를 프라이팬에 얹으면서 봄에 처음 돋아난 부추는 남편도 안 먹인다고 불쑥 말했다.

부침개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럼 언니가 혼자 다 먹어?

했더니


아니, 군서방 먹이지.

하는 언니의 말에


푸 하고 입안의 것을 뿜을 뻔했다.

군서방?

푸하하하하


한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는 언니의 과묵한 아저씨는 빙그레 미소만 띠울뿐 말이 없다.


며칠 전 주말 오후에 언니와 등성이의 밭을 둘러보다 나뭇가지 끝마다 속속 올라오는 두릅을 쳐다보며 언니가 하는 말


야들이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아니면 산등성이라 바람이 맵짜서 그런가, 파마머리처럼 곱슬곱슬하다.


고 연신 이상하다를 연발했던 그 두릅나물도 식탁에 파랗게 데쳐져서 곱게 올라와 있었는데 데쳤더니 파마머리가 이렇게 쭉 펴졌다며 새콤한 초고추장에 찍어먹어 보라고 언니가 나에게 자꾸 권한다.

또 능개승마나물, 갓 돋아난 미나리나물, 봄나물의 향연인 듯, 식탁이 온통 이것저것 파랗다. 후덕하고 부지런한 여인들의 손길로 동네 집집의 식탁은 이렇게 이 계절의 생것들로 어슷비슷 할 것이다.




그네들은 이 계절에 철철 히 나오는 이 봄나물들이 생것으로 먹고 남으면 마당에 큰 가마를 걸고 장작불을 때며 새파랗게 데쳐서 따사로운 햇볕과 산들산들한 바람에 말려 묵나물을 만든다.

영자언니의 집 앞 돌계단에 아무렇게 앉아서 장작불에 봄나물을 데쳐내는 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건너다본 앞산은 헐렁했던 쓸쓸한 모습이 간데 없어지고 무수한 이파리를 단 나무들이 푸르름을 외치며 겨우내 내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삽화를 자연 속에서 실물로 완성해내고 있다.

문득 올봄엔 새들이 내 집 정원의 나무들에 깃들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아마 저기 촘촘하게 푸른 앞산에 둥지를 만들고 새끼들을 키우고 있을 거라 상상하며 눈을 조프리며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해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앉았다.

이제 향긋한 봄나물의 이 계절이 지나면서 푸르름의 계절이 예비되어 있음에 나는 감사하고 살맛이 날 따름이다.



2023년 5월 12일 신관복 쓰다.


KakaoTalk_20230511_213053675_03.jpg 그에게 갔다 온 날 저녁 아들며느리와 함께 오랜만에 평양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냉면그릇이 제각각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저녁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