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김정애)

어머니(김정애)

by 신관복

1950년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어디론가 피난을 가던 중 엄마와 언니를 잃어버려 열여덟살까지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컸다고 한다. 아홉 살 때 엄마, 언니와 헤어졌다고 하니 출생연도는 1941년으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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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는 최씨였지만 길러난 집의 성씨로 개명하여 김정애로 살았다. 본명은 최문숙.

나의 외가 집은 해방 전 외할아버지께서 사립학교 교장을 지낸 넉넉하지는 않으나 보통 선비의 집이었다. 내 어머니 위로 언니 외에 오빠가 둘씩 있었지만 한국전쟁 중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은 인민군 입대를 기피하여 제각기 집을 떠났는데 나중에 어머니의 가족문건에는 외할아버지 폭격에 사망, 외삼촌들은 행불로 남았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도저히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자손들의 앞날을 염려하여 그렇게 문건에 기록했다고 한다.

딸인 내가 시집가기 전까지 어머니의 생활원칙은 내 딸은 결혼시키기 전 까지 부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것 과 밥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무슨 의미인즉 여자는 시집가서부터 평생 안식구로서 가족들 식사를 책임져야 하니 결혼 전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구질구질하게 부엌일 할 것 없고 밥하고 동자하는 법은 자연스레 익히게 될 것이니 미리 가르쳐 시집보낼 것 없다는 뜻이었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이 생활신조는 본인이 어려서부터 당한 설음과 고통을 눈꼽만큼도 당신의 딸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기인된 것이고 또 평생 흔들리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아홉 살부터 열여덟살까지 최씨인 어머니가 김씨네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김씨집 딸들이 아침 늦게까지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깨어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김씨집 안주인과 같이 늦게 잠자리에 들고 새벽같이 안주인과 같이 일어나 온갖 부엌일과 심부름을 도맡아 하였는데 어머니의 키가 150센티도 될까 말까 한 것은 한창 클 나이에 광주리를 하도 이고 다녀서 크다 말아서 그리 되었다는 것 이었다. 김씨집 안주인이 시장에 갈 때면 둘이서 한껏 광주리를 가득 채워 가지고 갔다가 다 팔고 또 필요한 것 들을 가득 사서 담아 이고 돌아 오군 했다.

어머니의 학력은 성인학교 다닌 것이 전부였다.

한국전쟁 후 이북에서는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이 벌어져 한글을 깨치지 못 한 사람들을 위해서 성인학교를 운영했는데 여기서 모든 아낙들과 머리 큰 남자애들이 우리글과 셈법을 배웠다. 해서 어머니도 글을 잘 읽고 썼는데 받아쓰기 속도가 느려서 직장에서 매주 진행하는 학습회에서 노트정리를 못하고 매번 잘 받아쓴 동료의 노트를 빌려와 베껴 정리하군 했다. 내가 이남에 와서 조금 놀랐던 때가 내 어머니 나이되는 여인들 중에도 문맹자가 많아서 칠십이 흘쩍 넘은 지금에야 한글을 깨치는 TV프로들을 심심치 않게 보면서 였을 때다.

그만큼 이북에서는 일치감치 문맹퇴치 하나는 확실하게 했다고 비교가 되었었다.

어머니는 김택관의 집에서 김씨로 살던 열여덟살 되던 해에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잘 모르지만 황해도 평산에서 살던 외할머니와 이모를 찾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친정이 생겨 친정나들이를 자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스물네살 되던 1965년 5월 평범했지만 유난히 유교적 관습이 강한 신씨집안의 1남4녀중 외아들이었던 아버지 신국헌과 결혼하게 되었다.

신씨가문의 인물은 어느 대부터 물려받았는지 특히 남자들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할아버지나 오촌큰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이어 내 오빠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남풍의, 여인들의 눈을 호리는 그런 매력적이면서도 씩씩한 모습들이었다.

결혼하기 전 어머니가 아버지와 선을 보게 되었는데 몰래 바라본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생겨서 그 순간에 이 사람에게 무조건 시집가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부터 아버지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선천적 지병이 아니라 인민군복무시기 달리는 트럭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는데 그 때 입은 뇌진탕의 후유증이 심심치 않게 발작하군 했다.

내 어렸을 때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하면 한밤중에 아~아~ 발작을 일으킨 아버지를 온 가족의 여인들이 둘러싸고 손발이며 팔다리 할 것 없이 아버지의 온 몸을 주무르면서 진정시키던 모습들이 잊혀 지지 않고 남아있다. 어머니는 결혼해서 일 년 남짓은 아버지의 지병을 몰랐지만 차츰 병세가 깊어지면서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를 하늘같은 지아비로 여기고 여자가 한번 시집오면 시집귀신으로 죽어야 한다는 당신의 그 한결같은 철학은 딸인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주입시킨 확고한 여인관이었다.

신씨집에서는 어머니를 외며느리로 맞아 결혼 후 아버지 살아계시는 10년 동안 2남2녀를 얻는 경사를 맞이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손녀인 내가 태어났을 때는 모른척하고 잘 들여 다 보지도 않았지만 오빠와 내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에는 백일잔치요 돌잔치요 성대하게 차리고 온 마을 사람들 불러 푸짐하게 대접하고 그 점잖은 분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자그마한 우리 며느리가 떡메 같은 아들을 둘씩이나 낳아주었다고 기쁨에 겨워하군 했다.

아버지가 1남4녀 중 외아들인지라 밑의 여동생들이었던 세 고모(아버지 위 누나였던 큰 고모는 시집가서 제외)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우리 가족 여섯 명, 실로 이 대가족이 함께 살던 전형적의 조선시대의 가족 모습이었는데 고구려의 왕궁 안악궁터가 가까이에 있는 평양의 아름다운 대성산기슭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던 이 신씨가문이 1967년 여름의 대홍수로 집이고 가장집물이고 모두 물에 떠내려가 잃고 나라에서 수재민들에게 배정해준 금수산기슭, 그 유명한 김일성종합대학 앞 룡흥동의 오층짜리 아파트 달랑 두칸 짜리 집에서 오골오골 지지고 볶으며 같이 살았다.

내 나이 일곱 살 나던 1975년 4월과 6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뜨면서 신씨가문은 룡흥동 온 동네에 슬픈 상가로 소문났고 그 해 9월 어머니가 막내여동생을 출산하면서 다시 한 번 온 집안 여인들과 동네사람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 모진해의 어머니의 나이가 서른넷이었다.

어머니는 서른넷에 아이 넷을 슬하에 둔 과부가 되었고 할머니는 아들을 앞세운 비정의 여인이 되었다.

예로부터 남편을 잃으면 앞산이 안보이고 자식을 잃으면 하늘땅이 안 보인다고 했던가.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슬픔을 지탱하지 못하고 자리보존하고 누었는데 아들을 앞세운 할머니는 그 하늘땅이 꺼지는 듯 한 엄청난 아픔을 꾹꾹 삼키며 감히 울지도 못하고 남편 잃은 며느리를 보살피기에 바빴다. 그 며느리가 유복녀를 출산하자 집안은 또 한 번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그 모질고 아픈 세월도 묵묵히 가고 가서 어머니는 우리 사남매가 커가는 걸 보면서 악착같이 살았고 할머니와 고모들도 어머니 보다 더한 혈육의 정으로 온 힘을 다해 억척같이 가정을 유지하며 신씨 자녀들을 키웠다.

다행이 아버지가 남기고 간 신씨의 혈점들은 억척같은 여인들의 손에서 먹고사는 어려운거 모르고 반듯하게 자랐고 공부들도 잘했다. 자식 키워서 덕 볼 거 없다는 말을 줄창 달고 살던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학부형총회에서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아들 덕, 딸 덕 좀 보려나 얘기를 은근슬쩍 하군 했다.

아이들은 청춘의 부푼 꿈을 안고 잘 커서 대학들을 졸업하고 동생인 내가 먼저 결혼하고 2년 후에 오빠가 결혼 하면서 어머니도 사위, 며느리를 보고 손자, 손녀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었다. 어머니에게도 화락하고 행복한 시절이 오는 듯 했다. 고모들은 우리 형님이 이제야 자식들 덕 좀 보며 좋은 세상 살게 되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해 마지 않았고 어머니 직장 동료들과 동네 사람들도 관식이네가 늘그막에 팔자 피이려나 며 그렇게 덕담을 마다하지 않았다.

설음과 모진 고난의 연속이 어머니의 팔자로 미리 정해져 있었던지 좋은 시절은 잠깐, 55세 되던 1996년 4월 한식날 지주막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는 그 후 2003년 5월 1일 눈을 감는 날까지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럽게 살다 가셨다.

딸은 어머니를 많이 닮는다고 하던가. 내 남편은 요즘 나를 보고 “김정애오마니” 라고 부르며 어떤 때는 섬찟 놀란다고 한다. 남편이 어머니의 가장 많이 본 생전모습이 목소리와 행동거지, 눈빛 모두가 지금의 내 모습과 제일 흡사하다는 것이다.

내가 벌써 그렇게 나이가 들었던가.

어머니는 생전 자식들에게 푸념하듯 하던 얘기가 있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병신이라도 남편이라는 사람이 집에 누워만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과부라는 소리. 거 좀 듣기라도 편하게 혼자 사는 여인 이라고 하면 안 되냐며.

젊은 시절 직장에서 어디 동원이라도 나가면 어머니는 동원지에 있는 몇 달 동안 그 동네 사람들에게 남편 없는 티를 내지 않아서 거기 사람들 누구도 몰랐다는 사실도 있다. 남편의 부재로 인한 타인들의 멸시와 동정이 어머니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위인 내 남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것 이었으리라. 내 남편은 일부러 쭉 빼입고 어머니의 직장으로 자주 찾아가 국수 한 그릇 청해서 먹고 오거나 주방 아주머니들과 얘기를 나누다 오군 했다. 어머니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결혼 전부터 내 남편만 나타나면 묻지도 않는 주위 사람들에게 환한 얼굴로 우리사위, 우리사위야 하면서 자랑하기에 바빴던 어머니. 그만큼 남편의 부재로 인한 서러움으로 한이 맺혔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성인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것 밖에 없어서 유식한 말로 자식들을 가르치며 키우지 못했지만 당신 나름 이것만 지키면 된다. 라는 명언이 있었는데.

“거짓말과 도둑질만 하지 마라.”

“학교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해라.”

“공부는 못해도 학교를 하루라도 결석하면 안 된다.”

“못살고 못 입어도 주눅 들지 마라.”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그 시집귀신이 되어야 한다. 설령 시집에서 내 쫒는다고 친정에 오지 말고 시집 문지방 베고 죽어야 한다.”

“시집 식구 몰래 친정에 뭔가를 갖다 주는 거 어미는 절대로 안 받는다.”

“남편은 하늘이고 지아비다. 끝까지 한 남편 섬겨야 한다.”

“외손주 보느니 파밭 김매는 게 더 낫다.”(어머니는 이 말은 항상 외손주는 파밭이다 로 생략하군 했다.)

결혼 전까지 어머니에게 들은 훈계는 대략 이런 것 이었다. 이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사남매의 성격과 사회관,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가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하늘같은 지아비로 말로 사랑의 감정으로 대한 적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곤 같은 여인으로서 어머니가 참으로 가엾어지군 한다.

당당히 처녀로 한 남자에게 시집와서 둘이서 알콩달콩 생활은 꿈도 못 꾸고 오직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의무. 한 가문의 며느리로서의 중대한 의무. 어머니로서의 무거의 의무만 잔뜩 걸머지고 그것이 숙명인 듯 때로는 시어머니를 향해 서러운 푸념을, 때로는 자식들에게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자신의 생활궤도에서 한번 도 탈선하지 못하고 살다 간 어머니의 한평생이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켜 시집보낸 어머니에게 한번 도 도움이 되 주지 못한 이 불효막심한 딸이, 결혼 후 시댁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그 집식구들 아침밥상을 따끈하게 차려먹이고, 허겁지겁 직장에 출근했다가 꽁지 빠지게 급한 마음으로 퇴근해 또 저녁밥상을 차려내면서, 이렇게 무려 12년 동안이나 어머니가 귀에 못 박히게 말한 그 시집귀신으로 살아오면서 어머니에게 내손으로 따끈한 밥 한 끼 제대로 차려 드린 적 없는 이 불효막심한 딸이 지금도, 아직도 어머니 제사상에 밥 한 끼 못 올리고 살고 있다.

세상살이가 왜 이런 건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나게 해주십사 하늘을 향해 빌 군 한다.

많이도 만났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꿈속에서라도 만나서 무슨 얘기인지 두런두런, 무슨 일인지를 느릿느릿, 때로는 왁자지껄 했는데 모든 것이 뿌옇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나고 깬 다음 날은 이유 없이 좋다.

내가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러 아주 그 곳으로 가는 그 날까지 이승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영혼을 붙들고 살 것이다. 불쌍했던 어머니의 이승에서의 넋을 저승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 꿈속은 이세상과 저세상의 사이길인가.

2019년 9월 27일 영월시골집에서 신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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