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국화
정원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나의 소나무길을 바라본다. 소나무길이 끝나면서 지금 한창인 하얀 구절초가 하우스 둘레길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사과나무밭에도 꾸지뽕나무밭에도 가장자리는 온통 구절초가 자리하고 있다. 가을 중 나의 시골집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지금인 것 같다.
구절초는 그 추운 영월의 겨울도 이겨내고 3월이면 푸릇푸릇 어김없이 새순을 내미는 강인한 꽃이다. 또한 그 뿌리를 얼기설기 땅속에서 억척같이 뻗어내려 다른 씨앗들이 자기 주변의 영역에 싹이 트지 못하게 잘도 번식하는 꽃이다.
6년 전 남편이 내가 하도 졸라대서 한 열포기 정도 얻어다 군데군데 심어놓았던 이 꽃들이 지금은 집 둘레 곳곳을 점령하고 있다.
문득 올 가을에는 국화를 정원에 들이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해마다 9월 중순경이면 남편이 단골 꽃집인 행주산성의 어느 화원에서 제일 소담하고 색깔이 예쁜 가을국화 화분을 세 개씩 사서 나에게 선물하군 했다. 작년 가을에도 입원 차 서울로 올라갔다가 아들과 함께 잊지 않고 화원에 들러 국화를 사고 나오면서 그 집 아주머니에게 죽지 않으면 내년에도 또 오겠다고 말했단다. 영문 모를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을 꽃집 아주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편에게 뭐 그런 말을 했냐고 가볍게 웃었었다.
영월시내 중앙로 상가 문 앞 곳곳에 예쁜 국화화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올 가을은 그저 이렇게 거리의 국화를 보면서 나의 가을을 보내야 할 가부다 며 허전한 마음을 다독거렸었다. 국화는 선물을 못 받았어도 구절초가 이렇게 장관인데...
남편이 애지중지 가꾸고 보살폈던 사과나무에 너무나 빼곡히 사과알이 달려 익어가고 있는데 사과알들이 모두 세수를 못한 애들같이 시컴시컴한 물때가 앉아있다. 주인 없는 사과나무들에 벌이며 파리며 온갖 곤충들과 새들이 제멋대로 눌러 붙어 익어가는 사과를 갉아먹고 있다.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너희들이 실컷 먹고 나머지가 있겠지. 설마 꽃을 솎아주지 못해서 이렇게 빼곡이 달린 사과를 다 먹어야 치울라구...
꾸지뽕나무는 사과나무보다 더 허겁소리 날 지경으로 나무 자체가 맥을 못추고 있다. 9월에 일치감치 낙엽이 지더니 파란 열매가 빨갛게 익을 줄 모르고 있다. 올해 너희들은 못 먹겠구나, 어떻게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아나봐, 남편의 손길이 없으니 너희들도 열매를 진작 포기 한 거니? 작년에 우리 집 꾸지뽕을 먹어본 지인들이 올 여름부터 가끔 잘 자라고 있냐고 물어 볼 때마다 올해 꾸지뽕은 못 먹을 거 같다고 기대하지 말라고 답 하군 했다. 복숭아는 한 알도 못 먹었고 그렇게 크고 달던 배도 몇 알인가 달린 것을 곤충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정원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나무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 파랗고 드높은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보 그 곳도 이렇게 아름다워?
그리고 안 안프지?
음 여기는 그렇고 그래, 아프진 않아 난 항상 알룩(남편이 나를 부를 때 애칭)이를 볼 수 있고 알룩이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
당신이 아프지 않는 걸로 만족해, 몸이 없으니까 당연히 아프지 않겠지.
올핸 정원에 국화가 놓이지 않으니까 섭섭하다, 근데 구절초가 너무 예쁘게 많이 피어서 그걸로 만족해.
알룩아 미안해 국화선물 못해줘서 그리고 사과랑 꾸지뽕 열매 잘 안 됐다고 너무 걱정 마 내년에 꼭 풍년이 올 거니까, 내가 여기서 더 노력할게.
고마워 여보 난 당신이 항상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해, 그래야 살아지니까.
나는 가끔 이렇게 나와 남편의 대화를 내가 혼자서 묻고 답 하군 한다, 소리 내어.
김영하작가의 올해 4월 신작 “작별인사”를 읽고 정말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 영혼은 존재한다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
몇 개의 뼈와 재가루로 남은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서 육체가 없는 그는 나의 곁에 보이지 않는 의식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의식을 백업 할 수 있고 그 의식은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기계지능의 일부로 영생할 수 있다는 그 추론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다.
세브란스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 한지 24시간도 채 못 되어 영원히 심장을 멈춘 남편의 의식은 그 순간에 육체를 빠져 나왔을까?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아끼고, 위해주고, 감싸주었던 내 곁에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항상 머무르며 나의 목소리에 화답하고 지켜주고 있는 거라고 느끼고 있다.
올 가을 내 집정원의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크나큰 당신이 있어 조그마한 이 몸이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남편의 선물 국화가 없어도 온 정원에 하얗게 핀 구절초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10월을 보내고 있다.
2022년 10월 3일 개천절 신관복.
작별인사를 선물해준 조윤영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