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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관복 Feb 28. 2024

할머니와 엄마의 숙명

임진강 건너 북녘하늘을 바라보다.

할머니는 우리글을 깨치지 못했다. 어릴 적 나와 동생이 할머니 앞에 신문을 거꾸로 펴놓고 큰 제목 글을 가리키며      


할머니 함 읽어봐, 뭐라고 썼겐?     


신문이 거꾸로 놓인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손자손녀를 웃길 요량으로 한 자 한 자 검지손가락으로 짚으며 “노동신문”이라고 큰 소리로 읽곤 하였다.     


할머니 그다음 줄도 읽어봐.

모르겠다, 너들이 읽어주렴.      


하고 돋보기를 코에 걸고 하던 바느질을 계속하던 할머니 모습.     


1917년생이었던 내 할머니는 열한 살 나던 해에 생모가 다른 남자를 따라 어린 딸을 집에 남기고 북쪽 무산 어딘가로 멀리 떠나버려 홀아버지 손에 길러졌는데 열아홉 살에   삼신탄광(오늘의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노무자였던 내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결혼 당시 내 할아버지 나이가 서른이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그때에는 처녀 집에 돈을 주고서야 아내를 맞아 올 수가 있고 처녀 집에서는 딸을 내어주는 명목으로 받은 돈을 다시 아들 장가 들이는 비용, 즉 며느리 데려오는 비용으로 썼다는 이야기를 그 시절의 유명한 작가들의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 흔하게 접했었다. 내 할아버지도 돈이 없어 아내를 못 얻고 있다가 역시 홀아비 손에 가난하게 자란 11살이나 어린 내 할머니를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두 달 사이로 모두 돌아가셔서 우리 집은 오빠와 남동생을 제외하고 모두 여자들이었다. 할머니, 엄마, 고모 셋, 나, 여동생 이렇게 여자들의 틈에서 오빠와 남동생 특히 오빠는 어릴 적부터 온 집안 여인들의 보물이었고 기둥이었다.

그리고 3대 외아들이었던 내 아빠의 자녀들인 우리 4남매도 유일하게 대를 이을 신 씨 집안의 아이들이라 억척같은 여인들(할머니, 엄마, 고모들)의 손에 먹을 거, 입을 거 걱정 없이 길러졌는데 뿌리 깊게 남아있던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에 세뇌되어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밥상도 남자상 여자상 따로 차렸는데 남자들은 밥, 국그릇 반찬그릇 따로따로 정갈히 담아 들여오고 여자들은 밥도 양재기에 하나, 국도 양재기에 하나 통째로 들여와 각자 그릇에 먹을 만큼 덜어먹거나 숟가락으로 같이 떠먹었다.

할아버지는 딸들인 내 고모들이 집안에서 큰소리로 웃고 말하는 것을 싫어했고 여자들의 입성이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으면 모두 5층 베란다 밖으로 내던져 버릴 정도로 집안에서 여인들의 엄숙과 정숙을 요구하셨다.


     

엄마는 1남 4녀 의 외며느리(그것도 내리 3대가 외아들로 내려오는)로 아빠에게 시집을 와 귀한 아들을 둘씩이나 낳은 할아버지의 신통하고 사랑스러운 며느리였다. 남자가 그렇게 귀한 우리 신 씨 가문은 내가 일곱 살 나던 1975년 4월과 6월 두 달 차이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참극을 겪었다. 이때에도 집안의 여인들은 죄인이었다. 할머니는 자식을 앞세운 비정의 여인이 되었고 엄마는 사 남매의 아빠인 남편을 잡아먹은 기센 여인으로, 두 여인은 감히 바깥출입도 못하고 유복녀로 태어난 내 여동생 그 핏덩이를 가운데 놓고 식음 전폐하고 맞잡고 울기만 하였었다.     


내가 시집가기 전까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고 성인학교에서 우리글과 셈법을 깨친 엄마에게서 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훈계는      


지아비는 하늘이다.

여자는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다.

남편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

부부싸움하고 친정에 올 생각 꿈도 꾸지 말어라.

시집에서 내쫓으면 시집 문지방 베고 넘어져라.     


대략 이런 것이었는데,

안 듣는 척하면서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 말들은 남편 따라 출국하기 전까지 12년이나 한 내 매운 시집살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9명의 대식구였던 시집에서 그래도 맏며느리 노릇 톡톡히 하는데 기여하였고 슬프고, 괴롭고, 정말 모든 것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때에도 시집귀신이 돼라 한 엄마의 그 말을 곱씹으며 견디게 해 준 내 마음의 초석으로 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엄마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부엌에서 같이 식구들의 아침밥을 준비했는데 새벽에 뿌옇게 잠이 덜 깨어서 이불속에 든 채로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두 여인의 둥둥거리며 주고받는 말을 꿈속에서처럼 듣곤 했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푸념조로 지청구를 할 때가 많았고 할머니 쪽에서는 엄마의 푸념을 받아주며 그래도 어쩌겠냐, 관식이 봐서라도 뭐 이런 얘기, 어떤 때는 그걸 왜 그렇게 했수, 내가 애들 도시락 반찬으로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할머니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며 대체로 할머니가 엄마를 항상 받아주고 감싸주는 식이었다. 두 여인이 부엌이나 집안일에서 팽팽하게 맞설 때에는 내 오빠가 나서서 한 분을 부엌에서 나오게 하든가, 집에서 데리고 나가곤 했다. 두 여인네는 하늘처럼 받드는 내 오빠 말이라면 꼼짝을 못 했다.


30년을 함께 집안의 풍파를 같이 헤치며 살아온 두 여인은 나이가 들수록 서로 의지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엄마가 퇴근해서 집에 올 시간만 기다리며 앉았다가 퇴근해 오는 엄마를 버선발로 맞곤 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엌에서 미리 봐두었던 밥상을 들고 들어오고.

아들과 남편을 앞세운 두 여인은 불과 7년 차이로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내 남편이 내 곁을 영영 떠나던 그 순간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나를 시집보내는 날 시댁으로 가는 차에 오르기 전 딸과 사위의 절을 받으며 엄마가 했던 말     


할아버지가 지어준 네 이름에 福 자가 들어갔으니 팔자가 좋아서 이 어미처럼은 안 살 거라고, 오래오래 둘이 잘 살게 될 거라고.     


내 남편의 입관식 때 누워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엄마를 목메어 불렀다.     

엄마, 엄마처럼 서른세 살은 아니라고, 그래도 지금 내 나이 쉰 넷이라고.     


할머니가 떠난 지 일 년 만에 뇌출혈로 자리하고 누운 엄마에게 어느 날, 내 꿈 얘기를 했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가 어느 산등성이 밑에서 엄마 손을 끌며 자꾸 산 위쪽으로 올라가자고 재촉하는데 엄마는 안 가겠다고 손을 뿌리치며 자꾸 내려오려고 할머니 등 떠밀었다고. 병석에서 엄마는 얼굴에 화기를 띄우며 말했다.  


아, 내가 좀 더 니들 곁에 있으려 나부다.     


할머니는 당신이 떠난 그곳으로  7년 만 에 엄마를 데려가셨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할머니가 적적하셨거나 이미 오래전에 와 있는 외아들이 더 쓸쓸해 보여서 며느리를 빨리 데려가신 듯하다.     


요번 구정 설 때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녀아기 모두 함께 임진강을 건넜다. 케이블카를 타고. 그 금단의 강을 건너 멀리 북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험한 한평생 그 모든 엄청난 아픔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다 가신 내 할머니와 엄마의 무덤이 있을 대성산기슭의 그 아늑하고 순한 땅을 생각했다.      


엄마,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던 사위랑 잘 지내고 있지, 나 혼자서도 여기서 잘 살고 있어.     


2024년 2월 28일 신관복 쓰다.     

내가 좋아하는 김유정작가의 소설 봄 봄을 읽으며.

임진강을 건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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