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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관복 Apr 14. 2024

綠山

7. 평양에서 일주일간

  평양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아침부터 온 집안이 부모님 진갑잔치 상차림에 떠들썩하였다. 주방에서는 음식솜씨가 좋은 누이친구까지 합세하여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거실에서는 성미가 꼼꼼한 누이남편이 상차림을 맡아보느라 분주한 가운데 아버님은 주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시며 콧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상차림은 옛날식으로 음식들을 그냥 높이 쌓지 않고 정갈하고 화려하게 차리기로 나와 누이남편이 콘셉트를 잡고 온갖 과일과 당과류 그리고 음료와 주류들을 자기 위치에 잘 배치하고 나중에 백설기떡과 카스텔라를 판으로 5단으로 쌓고 상 하단 앞쪽에 다시 싱싱한 과일들을 큰 바구니채로 보기 좋게 배치하여 놓으니 보는 사람마다 잘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훗날 우리 세 식구가 서울에 와서 국정원에 있을 때 나를 담당했던 여성조사관이 우리들의 소지품속에 있는 진갑상차림사진을 보며 이 평범한 사진에도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질문이 많았었다.  저녁 6시가 되어 온 집안 식구들과 친지들이 자리 잡고 서있는 가운데 자식들 순서대로 부모님께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데 아버님이 받는 술잔마다 비우시는 것을 보고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그렇게 다 받아 마시다가는 이 숱한 사람들 술잔 다 받기도 전에 취해서 인사불성 되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하시는 바람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 와중에 어머님 왈, 이 와인 물 건너온 것이라 정말 마셔보지 못한 새로운 맛이라고. 식을 거행하는 도중에 정전이 되어 누이남편이 이때다 라며 촛불을 여기저기 밝히고 어머님 피아노곡을 청해 듣자는 요청에 다 같이 박수하며 조용히 앉았는데, 고운 초록색한복을 입으신 일흔두 살의 연주가가 건반을 울리는 쇼팽의 녹턴은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어머님의 피아노소리였다.     

  

  2월 중순이라 평양의 날씨는 맵짜게 추웠고, 공기는 쨍하게 맑았다. 나는 평양역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회오리바람이 거리 군데군데 말려 오르며 불고 있었고 추운 얼굴과 옷차림의 사람들이 궤도전차 정류장에서 서성이다가 전차가 도착하면 와와 몰려다니며 승벽내기로 전차에 오르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이상하게 무궤도전차정류장에는 길게 줄을 서는데 궤도전차정류장에서는 줄을 서지 않고 뭉텅이로 몰려들 있었다. 한산한 거리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길 오른쪽 가장자리로 걸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일정으로 따로, 또 부부동반으로 같이, 지인들과의 만남으로 바빴다. 평양역 근처 그리 요란하지 않은 요릿집에서 오래된 지인과 만났다. 굳이 식당이라고 하지 않고 요릿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밥 한 끼 먹는 그런 곳이 아니라 그 무슨 사업인가를 한다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접대하고 술잔을 나누는 만남의 장소였던 것 같았다. 밥 먹던 와중에 쳐다본 메뉴판의 음식 값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래도 원화로 운영되는 요릿집이었다. 둘의 식사비가 그 당시 직장인 한 달 월급을 넘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은 정갈했고 맛은 최고였다. 유명한 집인지, 아니면 평양의 중심은 좁아터졌는지 식사도중 지인이나 내가 아는 얼굴들을 여러 명 대면하여 목례를 했고 말을 섞었고 나오면서 인사를 했다. 점심을 이렇게 둘이 먹었는데 저녁은 그 지인의 집에 우리 가족 셋이 초대되어 같이 식사를 했다. 식사도중 정전으로 음식을 뒤로 젖혀두고 촛불아래 두 가족이 모여 앉아 나이찬 자식들의 혼사얘기로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그 지인의 모습이 지금도 언뜻언뜻 생각나고 그때마다 지인의 나이를 헤아리며 일흔 중반이 되어 있을 그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기도 했다. 나의 직장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남편 따라 출국 전 나의 직장이었던 대학 모교의 정보공학연구소 소장과 부소장과의 만남을 위해 갔던 곳이 대학 근처의 어느 외화로 운영되는 식당이었다. 식당내부는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을 주기 위해 불그스레한 조명을 하고 있어서 나에게는 어두컴컴한 곳으로 느껴졌다. 긴 생머리를 올백으로 묶은 여종업원들이 식탁에 착석한 손님들에게서 식사주문을 받아 적었고 날렵하게 유리글라스에 물을 따라주었다. 요구에 따라 차를 따라주기도 했다. 잔잔한 클래식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정체는 알 수 없는 곡이었다. 외국의 어떤 레스토랑을 흉내 내고 있는 이런 식당에서 가난한 공학도들이며 대학동기, 후배인 그들과의 식사자리가 마냥 즐겁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주재원가족으로 단동에 있는 그 기간 동안 자기들이 원하는 일, 이를테면 연구소 컴퓨터장치들을 남편의 회사물품들을 들여올 때 같이 평양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본인들로서는 최고의 접대를 한답시고 이렇게 애쓰고 있었다. 그 시절엔 몰랐었는데 서울에 와서 공학도들의 몸값, 특히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전문가들의 어마어마한 가치에 놀라며 이 두 사람의 아까운 재능에 대해 남편과 나는 늘 허전한 말을 주고받곤 했다. 서울에 있었으면 억 소리 나는 연봉의 소유자들이 되었을 터인데. 여기로 말하면 “한글”프로그램과 동등한 북한판 우리말 편집프로그램인 “창덕”이나 “서광” 프로그램의 창시자들이었다. 나중에 그들의 간절한 부탁대로 록산무역 대형트럭에 실은 컴퓨터장치들이 대학정문에 도착했을 때 당시 대학의 이종진당비서가 직접 정문에 나와 출근하는 교직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우리 부부의 이름을 거론하며 모교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 좋은 사례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했다고 출장 나온 사람들을 통해 들었다. 그 좋은 사례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서울로 왔을 때 회오리바람처럼 휩쓸어 퍼졌을 그 배신의 이야기들이 어땠을지, 그리고 그 아까운 공학도들의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을 공허감과 상실감이 어땠을지, 지금은 그저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평양을 떠나기 3일 전 저녁시간에 보통강구역 황금벌역 뒤쪽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의 집을 찾았다.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시댁살림이었다. 신랑감이 김대 철학과출신이라고 간판과 외모를 보고 내가 중매 서서 맺어준 여동생 시댁의 살림은 궁기가 흘렀다. 엄마처럼 이 언니를 의지하고 살아온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여동생은 나와 남편이 집에 들어서자 눈물로 맞이했다. 폐를 끼칠까 봐 저녁식사는 사양했는데도 그래도 미리 연락을 받고 준비했다고 술상부터 들여왔다. 두 동서가 마주 앉고 여자들은 옆자리에 그냥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출국할 때 심한 입덧이 왔던 여동생이 낳은 아기가 벌써 20개월쯤 되어 있었다. 신통히도 엄마를 닮은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시집살이의 서러움을 토로하는 당돌한 여동생의 눈물바람에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남편이 처제의 등을 토닥이며 동서 좀 잘하지, 하는 말을 들으며 나도 머리를 돌리고 눈물을 씹으며 아기를 어루더듬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고부갈등은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여인들이 겪는 고통이지만 의지할 친정이 없는 여동생에게는 특별히 가슴 아픈 것이어서 제부에게 향하는 나의 치미는 울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도 또 정전이어서 등잔불을 밝히고 술 한 잔씩 마시며 새벽까지 앉았다가 날이 밝은 대로 보통강가를 걸어 안산동 내 집으로 돌아왔다. 잔잔한 보통강 강물 위에 뽀얀 안개가 덮여있었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아침이었다. 지금도 여동생을 생각하면 그날 아침의 보통강 물 위에 서려있던 안개가 같이 떠오르곤 한다. 그날 오후 햇볕이 따스한 때에 여동생이 아기를 업고 내 집으로 찾아왔다. 어젯밤 눈물바람에 언니와 미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못 나누고, 또 단 둘이 시간도 보내고 싶고, 조카인 내 아들에게 작은 베토벤석고상을 선물로 주려고 왔다고 했다. 그 애를 말없이 끌어안고 오래 동안 등을 어루만졌다. 점심은 먹고 왔다고 한사코 사양해 햇볕이 좋아 아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 언니 혹시라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그 애는 선선히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외국에 오래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고, 나는 여동생과 아기를 통째로 끌어안고 한참 동안 거리 한복판에 서있었다. 지갑의 돈을 탈탈 털어 동생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언니 들어가라고 연신 손짓하며 아기 업고 뒤돌아보며 걸어가던 여동생의 모습이 평양에서 마지막으로 본 내 혈육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무슨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응하여 심각한 분위기로 보도를 진행하는 조선중앙방송 아나운서의 비장한 목소리를 들으며 평양에 발이 묶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 남편은 하루빨리 단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며 회사에 평양발 베이징행 국제열차표를 주문했고 우리는 평양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베이징행 국제열차에 몸을 실었다.      


2024년 4월 14일 일요일 신관복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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