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 4
정전으로 방안 창가에서 내다본 바깥세상은 온통 캄캄했고, 희미한 등잔 불빛들이 맞은편 아파트 창가에 드문드문 비치고 있었다, 약한 경적을 울리며 벌건 전조등 불빛으로 먹물 같은 어둠을 헤가르며 달리는 차들이 이따금 이 캄캄한 밤의 적막을 깨트리곤 하였다. 등잔불에 의지하여 저녁을 느지막하게 해 먹고 식구들은 제각각 자기 방으로 들어가 이불 쓰고 누웠는지, 아니면 멀거니 앉아 있는지, 온 집안도 적막 속에 잠겼는데, 나는 홀로 부엌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설거지는 미리 받아놓고 쓰는 물바께쯔 물을 바가지로 퍼서 두세 번 헹구어 엎어놓고, 정전으로 멈춘 냉장고 안에 반찬 그릇들을 디밀어 넣고 화장실로 향하는데 밖에서 손으로 출입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출입문 쪽으로 다가서며 얼핏 거실에 걸린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라 더럭 겁이 났다. 출입문에 붙은 렌즈에 눈을 가져다 대고 밖을 살폈다. 웬 키가 장대 같은 젊은 남자가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일단 문에서 물러나 안방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옆방에 계시던 아버님도 덩달아 거실로 나오셨고, 작은방에서 내 아들과 시동생을 앞세우고 어머님도 촛불을 들고 거실로 나와 온 식구가 거실에 모였다. 동서는 임신 후기였는데 친정에 가고 없었다.
누구냐는 집안 남자들의 물음에 밖의 남자는 내 남편의 이름을 대며 고등중학교적 동무라고 했다. 그제야 남편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는데 그는 혼자가 아니고 약혼녀라는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 일단 아버님 방에 들이고 저녁은 먹었냐는 인사에 못 먹었다고 하기에, 나는 부엌으로 나가 이것저것 그러모아 작은 상에 차려 두 사람 앞에 가져다 놓고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과 아버님이 식사 자리에서 예의상 얘기를 나누어 주는 듯했다.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남녀손님을 그날 밤 아버님 방에 재웠다.
다음 날 아침 식구들은 모두 출근했고, 내가 저녁에 퇴근해 오니 아버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계시고 어머님은 어이가 상실된 모습으로 그 앞에 멍하니 앉아계시는 것이었다. 먼저 퇴근해서 자초지종을 들은 시동생이 나에게 오늘 낮에 그 밤중에 온 손님 남녀로 인해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의 전말에 대해 부모님에게서 들은 그대로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이야기해 주었는데 나도 입을 하 벌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사연인즉 이랬다. 모두 출근하고 아버님, 어머님이 두 손님을 상대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남자 손님이 불쑥 말하기를 자기들은 쌀장사를 하며 돈을 벌고 있고, 지금 이 평천구역 해운동 단층 마을 어느 집에 쌀을 넘겨받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바짝 구미가 동하신 어머님이 쌀을 얼마에 넘겨받는지 물었고 그 남자는 현시세보다 낮은 가격을 부르며 은근히 어머님도 사지 않으시려오 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한 달에 쌀 30kg도 훌쩍 더 먹어 치우는 왕성한 식욕들을 가진 대가족이 먹고사는 살림이었다. 아니 잡곡을 보태지 않으면 쌀 30kg도 어림없는 수량이었다. 어머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버님께 돈을 건네셨고, 아버님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쌀 실을 수레를 가지고 남자 손님을 따라나섰다고 했다. 쌀 60kg 정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두 남녀를 따라 해운동 단층 마을 골목골목을 가던 중 벽돌로 담장을 쌓은 어느 집 울타리 중간에 사람 두엇 서서 드나들 수 있는 좁은 구멍 앞에서 그 남자는 아버님더러 이 안집에서 쌀을 가지고 나올 터이니 기다리라 말하며 쌀값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그 구멍 안으로 사라졌단다. 오전 11시쯤이었는데 30분이면 나오겠지, 그 구멍 앞에서 기다리시던 아버님이 1시간이 되어 오자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 사연을 말하니 그런 사람 온 적 없다고 말하는 안집 여자의 말에 머리가 획 도는 듯한 어지럼 증세에 그대로 그곳에 자리하고 앉아 장장 오후 4시까지 점심도 꼬박 굶으시며 구멍만 쏘아보고 계시다가 터벅터벅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시동생의 말끝에 아버님의 보탠 한 마디가 더 황당한 것이었는데, 어젯밤에 한방에서 같이 자리한 그 남녀의 해괴망측한 짓거리에 한숨도 못 주무셨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한 동네서 같이 살아 집안끼리도 다 아는 사이였고 남편의 고등중학교 동창이었던 그 남자는 이렇게 한 밤중에 우리 집에 찾아와 먹여주고 재워준 선한 인정에 사기로 대답하고 달아났다. 그것도 약혼녀라는 여자까지 데리고 와서.
너도 나도 먹고살기 어려운, 소위 당국에서 말하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막다른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이렇게 옛날의 지연이나 인연을 양심과 바꾸어 팔아 목숨을 연명했다. 그날 밤, 등잔불 가운데 놓고 둘러앉은 부연 어둠 속에서 가족들은 아마 그 남자가 우리 집이 처음은 아닐 것이라고, 문 두드리는 꽃제비 아이들에게 찬밥 한 덩이 주는 한이 있어도, 아는 사람의 할아비가 와도 다시는 집안에 들이지 않는 걸로 의견의 일치를 때 늦게 보았다.
찾아오는 지인에게 밥 한 끼 먹이고 재워주던 작은 인정도 베풀면 안 된다는 이런 팍팍한 인심은, 지인이나 친척지간에서, 같이 사는 한 지붕 안의 가족들에게도 옮아갔고, 한 지붕 안에서 방마다 밥은 따로 해 먹고, 살림살이를 가르는 어이없는 진풍경이 별로 신기할 것도 아닌 사회의 보통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형제끼리, 부모와 자식끼리 살림을 가르고, 밥을 따로 해 먹는 한이 있더라도 같이 붙어사는 집은 그래도 살만한 집들이 었고, 그렇게도 도저히 끼니를 이어나갈 수 없는 가족은 부부가 갈라서든가, 기약 없이 처자를 친정집으로 보내든가, 제각각 뿔뿔이 먹고살 길을 찾아 흩어지든가, 그 시절 각각의 가정들은 각각의 처절한 방식으로 이 환란 아닌 환란의 시대 속에서 목숨들을 부지했다.
환란의 시절에 저마다의 악착스러운 방식으로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살아남아 그래도 좀 굶는 횟수가 줄어든 시기를 맞이한 사람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서로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말했다. 죽을 사람은 다 죽었다고. 세상과 단절된 꽉 막힌 곳에서 소싯적부터 당국의 선전에 세뇌된 사람들은 이 가증스러운 환란의 시절이 물러간 것에 안도했고, 살아남은 것에 안도했으며, 또 굶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언제 또 올지 모를 환란의 시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비하기에 서로들 바빴을 뿐이었다.
가끔 시골에 가면 몇 년간 한 회사에서 일하며 같이 밥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던 친근한 동료들끼리 서로 만나 밥 한 끼 먹을 날짜를 잡기에 바쁘다. 각자의 시간들을 쪼개보며 겨우 일시가 합의되어 어느 날, 드디어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할 말과 들어줄 말이 많은지, 두세 시간은 물론이고 자리를 카페로 옮겨도 그래도 할 말은 끝맺을 줄 모른다. 서울로 올라올 내가 기차시간이 되어 강제로 일어나며 다음을 기약하고,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에 올라 일몰로 온통 타는 듯 붉은 서쪽하늘을 마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 것이 이 밤중에 온 손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끼 밥과, 쌀을 위한 너무나도 판이한 이 두 현실에 대해 나는 그 어떤 거창한 논거를 이야기할 재주가 없어 그냥 이런 사실만을 나열할 뿐이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내 고향의 내 가족들과 함께 밥 한 끼 먹을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이 공간을 빌어 간절히 기도하며!
2025년 4월 6일 일요일에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