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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1년, 그리고 500년 후

태양계 밖으로 쏘아 올린 첫 유인우주선

by 신관복

서기 2841년 전장 220m, 전폭 84.4m, 승무원 731명을 태운 브레이브 호는 태양계 바깥을 탐험한 최초의 유인우주선이자, UE(united Earth)가 주도한 우주개발 50개년 계획의 첫 성취였다. 출발한 지 142일 만에 쌍둥이자리의 카스토르 근처에서 외계종족 젬(Gem)에 의해 격추당했고 생존자는 없었다. 발견된 잔해들 사이에 있던 메인 엔지니어 존 바티스타의 헤드기어의 메모리 속 기록들을 발췌 및 정리하여 데이터를 구축하였고, 500여 년 동안 인류는 이 외계종족 젬과 우주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최전선은 해왕성과 명왕성 사이의 카이퍼 벨트에 형성되어 있다.

유인우주선이 맞닥뜨린 외계종족 젬은 겉보기에는 점성을 갖춘 흙덩이와 비슷한 외견을 하고 있는데 정해진 형태가 없고 찰흙공예품처럼 자유자재로 변화한다. 이것들은 집단지성체, 즉 미미한 지능을 지닌 다수가 모여 개별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유형의 생물로 보이며, 특유의 의태능력으로 지구연합군의 전함 및 병기의 외양과 기능을 그대로 복제하고, 뛰어난 학습력으로 전력과 전술의 형태 및 개념까지도 유사하게 복제하여 전쟁에 임하고 있다. 학습력은 뛰어날지 모르나, 스스로 방법을 모색하고 답을 찾는 능력은 없어, 능동적으로 현실을 개변하며 이상을 추구해 온 인류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역설적이게도 젬의 출현이 창설 초기 UE의 인류 통일 활동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명무실해진 종교의 박멸, 갈등을 조장하는 민족주의의 말살, 공용어 및 문자의 선정, 각종 범죄자의 척결, 인류는 통합을 이루었고 젬과의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으며, 전승 후 거주 가능한 행성으로 이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지구연합의 세력권이 닿지 않는 남미 최남단의 우수아이아에는 노트 퀴어라는 무익한 성소수자로 불리는 불신자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수는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지구연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어 도시를 다스리는 공고한 공권력이 없고, 치안도 불안하고, 기술 수준은 원시적이다. 노트 퀴어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족주의에 대한 무한한 신봉이다. 무분별한 이성 간 생식행위를 벌여 과도한 번식을 일삼는 무리들로 규정되는 노트 퀴어들의 행태는 지구연합에서는 반사회적이란 말로 정의된다.

태양계 바깥으로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쏘아 올렸던 2841년 무렵에만 해도 인류는 자웅의 배우자와 혈연관계에 근거하여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인 가족중심의 생활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후 500여 년이 흐르면서 “딸”, “아내”라는 단어는 데이터를 검색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하였다.

UE(지구연합)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삼 년에 한 번씩 소집령을 내려 각 도심의 광장에서 사랑을 나눌 상대를 바꾸도록 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페닐에틸아민의 분비기간이 최대 3년이라는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며, UE는 3년 이후에 다가오는 것은 이해를 빙자한 오해뿐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때 사랑의 상대로서는 남녀 구분이 없고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의 파트너를 취한다.

UE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남미 최남단의 우수아이아에 모여 서식하고 있는 노트 퀴어들은 혈연관계의 가족단위의 생활을 고집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관을 저들만의 작은 세계에서 끊임없이 내재화하고 재생산한다. 그들의 세계에서 노인은 무조건 존중해야 할 대상이며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부모라는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동행을 면치 못한다. UE의 학자들은 이들이 오염된 바다로부터 식량을 얻는 것에 주목하여, 이상 수생생물을 계속해서 섭취한 탓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했다고도 밝히고 있다.

이들의 폐쇄성은 우수아이에서 태어나 자라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UE 측으로 귀순한 아벨 로드리게스의 발언을 통해 입증되었다.

UE로 귀순한 후 수행원과 함께 발바닥에 티눈이 자라도록 각종 촬영, 강연, 인터뷰를 다니던 아벨 로드리게스는 UE가 소집령을 내린 어느 날 어디선가 나타난 비행정에 실려 도심으로 향하면서 아래에 펼쳐진 텍사스의 거대한 어패류 양식장을 한눈에 보게 된다. 파도가 철썩이며 다가와야 할 곳에 덮인 두꺼운 철골과, 철골 위로 드높이 뻗은 유리는 이곳이 바다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고, 해류를 따라 물결이 휘돌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년을 담보한 바다가 햇빛을 융단처럼 늘어뜨리며 넘실대고, 거대하고도 투명한 유리가 바다 비슷한 것을 뚜껑처럼 덮고 있는 어패류 양식장은 불신자였던 아벨 로드리게스에게 수행원이 자주 말하던 “인류의 절심함의 완성”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까지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원재운작가의 단편소설“상식의 속도”를 간추려 발췌한 내용이다. 물론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만을 정리한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인 제갈량이 동성애자였다는 소설 속 UE의 데이터에 대해 잠깐 보기로 하자.


생몰연도가 서기 181~234년인 구 중화인민공화국 후 한 말 시기의 실존인물이자, 촉한의 초대이자 마지막 승상, 충신의 표본이자 희대의 전략가, 정치가 제갈량은 키가 8척에 용모가 출중하여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고, 첩을 두는 것이 누가 되지 않는 시대였음에도 죽을 때까지 한 명의 박색 한 아내와 살았으며, 성기능에 문제가 없었음을 입증하듯 마흔일곱에 첫 아이를 출산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아내와 결혼 후 유비의 초빙을 받아 그의 참모가 되어 제갈량은 유비와 침상을 함께 쓰며 늘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 하는데, 이 과정은 본인의 성향을 확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제갈량과 애정을 나누었으리라 추정되는 인물은 그가 섬겼던 유비 외에도 제자로 받아들인 마속과, 본디 위의 장수였던 강유가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 무결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제갈량은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동성애자인 자신 스스로를 감추고 속여야 했다. 수천의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갈량의 삶에 울림이 있는 것은 오히려 그가 겪어야 했던 슬픈 고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문장으로 데이터는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이 당선작이 되고 나서 SF작가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야, 이것도 SF냐?”라는 절규에 대해서 곰곰이 읽어보았다. 또한 열다섯 번 즘 우려낸 티백 같은 소재를 종류별로 버무려놓았다는 야비한 평과, 전쟁도 사상서도 아닌 SNS와 아이폰이 세상을 뒤흔드는 이 시점에 SF팬들의 자부심도 이것은 SF고 저것도 SF야 라는 확장으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들도 곰곰이 읽어보았다. 또 이 작품을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변기 커버도 올리지 않고 서서 소변을 봐 마킹을 해놓은 뒤 주무시던 집안 어르신의 뺨을 갈겨서 깨우고는 욕설을 내뱉으며 집주인 양 구는, 가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여 정신적 성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닌, 지성의 문제라고 지적한 평도 곰곰이 읽어보았다.


중구난방을 떠나서 이 소설에 대한 평가와, 소설 속 2841년의 지구의 모습과 또 여기서 500년 후의 우주에 대한 상상은 독자들의 몫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천명한 “모든 양의 질량을 가진 물체는 진공상태에서의 빛보다 빨리 이동할 수 없다.”는 진실은 예나, 1300여 년이 흐른 아득한 미래에나 절대적이다. 인류는 항상 먼 곳을 꿈꾸었고, 그래서 속도의 문제는 늘 어렵지만, 환상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인류는 점차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상식의 속도는 더디기만 해서 우리 모두는 지금도 그 속박의 굴레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작가도, 평론가도 아닌, 그냥 글을 보기도, 쓰기도 좋아해서, 글 속에서 나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글줄들을 통해서 내가 현생에 겪어야 하는 슬픈 고뇌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애쓰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이 “상식의 속도”라는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한 가지다. 상식도 인류가 만들어놓은 것이며, 따라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로 가려는 인류의 꿈과 더불어 발전하는 과학의 시대를 쫒아서 빠른 속도로 진화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골의 밤하늘은 구름 없는 날이면 진주를 뿌려놓은 듯 별들이 온 하늘에 반짝인다. 이따금 인간을 태운 여객기가 여느 별과는 구별되는 빨간 불빛으로 둥근 곡선을 그리며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1,300여 년이 흐른 미래시대에서 도대체 서기 몇 년까지를 "야만의 시대"라고 규정할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시대도 "야만의 시대"인가?


2025년 4월 27일 원재운의 소설 “상식의 속도”를 읽고 신관복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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