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일박이일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시골로 가고 있었다. 아침에 시골 갈 준비를 부랴부랴 하느라고 밥은 점심 겸 느지막이 먹고, 헐레벌떡 청량리역까지 도착해서, 역사 안의 아무 의자에나 털썩 주저앉아, 아까부터 팽창감이 느껴지는 불편한 배를 쓸어내리며, 열차 시간이 표시되는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영월행 열차의 승차가 뜨자마자 플랫폼으로 내려가, 열차에 올라 내 좌석을 찾아 앉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은 연초록에서 진초록의 계절로 슬며시 다가가고 있었는데, 겉 표정은 덤덤해 보이지만 그 안쪽에서 들은 생명의 힘찬 약진이 둥둥거리고 있으리라.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바람이 불고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졌다. 서울보다 역시 영월은 춥다.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빠르게 걷는데 기차역 주변 식당이나 상가들에 관광객들이 붐빈다. 영월소금빵, 석탄빵, 동강다슬기 국밥, 이가닭강정, 다슬기향촌 어디에나 궂은 날씨에도 대기 줄이 길다.
김삿갓면을 경유해서 산솔면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올라앉아, 물줄기 시원한 한강을 옆에 끼고 눈 부리 아득하게 뻗은 도로와 넓은 강 저쪽의 짙푸른 풍경에 눈을 주고 있다가, 갑자기 차창밖에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불현듯 중얼거렸다. 우산이 없는데, 비가 오면 어쩌지? 김삿갓면 고씨동굴을 지날 때에는 제법 빗줄기가 굵어지다가 옥동 쪽으로 가면서 또 잠잠해지는가 싶었다.
우리 마을에도 기어이 비는 내리고 있었다. 마을 동구 밖에서부터 시골길 가장자리를 따라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가늘게 내리는 비에 뽀얘진 안경 너머로 앞을 가늠하며 적막한 시골 마을길을 있는 힘껏 숨이 차게 나는 달렸다. 내 집을 향해. 길섶의 커다란 왕벚나무 가지들이 고맙게 비막이가 되어 주었다. 토요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올겨울 끝에 과일나무란 나무는 남김없이 베어 내어 휑해진 2단 위쪽 밭에 쭈그리고 앉아 나는 열심히 풀을 맸다. 이마에는 손수건을 질끈 동이고, 입에는 마스크를 쓰고, 머리 위에는 남편이 외출할 때마다 아껴 쓰던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가늘게 오락가락하는 비는 아랑곳없이, 잔잔한 구절초들이 즐비하게 자라고 있는 사이사이로 껑충껑충 솟아있는 풀대들을 악착같이 잡아 뽑았다. 힘겨루기 하며 뽑아낸 뿌리 깊은 잡초들의 밑동에는 옆의 구절초들이 같이 묻어 나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혼잣말로 “혁명을 하려면 희생이 따르는 법이군, 이럴 때 쓰는 말인가?” 하고는 울상을 짓고 작은 손짓으로 묻어 나온 잔생이 구절초들을 땅에 대충 묻어주곤 했다.
사방이 고요했다. 높고 밋밋한 오월의 수려한 산으로 사방 둘러싸인 시골의 밭 한가운데서 오롯이 땅에 엎드려 오로지 이 구절초밭의 풀만을 쉼 없이 뽑아내며, 나는 하얀 구절초꽃들이 장관을 이룰 올 구월의 이 밭을 상상했다. 엄혹한 겨울도 거뜬히 이겨내는 얘네들은 기어이 하얗게 물결치는 자기들만의 동산을 만들어낼 것이다. 후둑후둑 빗방울이 굵어지는 바람에 옆의 작은 하우스로 뛰어 들어가, 하우스 지붕 위에 툭탁툭탁, 쏴쏴 내리는 빗소리를 기분 좋게 듣고 있다가, 어느새 조용해지면 다시 나와 풀을 뽑고, 다시 하우스로 달려 들어가고를 여러 번 반복하며 혼자 웃었다.
정신없이 밭 가녘 쪽으로 앉은걸음으로 풀을 매 나가는데 이게 무엇이냐? 빨간 딸기가 여기저기 매달려 상큼한 향기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옳지 여기에 딸기밭이 있었지,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 노지딸기 철이잖아. 하우스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다 화분 밑받침 하나를 가지고 나와 바구니 삼아, 높다란 잡초 속에서도 알차게 익어가는 얼마간의 딸기를 정성스레 따고는 “오늘 저녁 후식으로는 꽤 괜찮은 양이군” 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혼자 말했다. “미안해, 딸기들아, 풀을 제때에 못 뽑아줘서, 거름도 못 뿌려줘서,”
따뜻한 물 한 잔 컵 가득히 부어 들고, 밤의 정원으로 나와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물청소하고 대걸레로 몇 번을 밀어낸 테라스 바닥은 옅은 물기가 남아 있어 정원 등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찌륵찌륵, 풀벌레 울음소리만 간간히 울려왔다. 물기를 머금은 정원의 소나무잎들과 철쭉잎들, 주단처럼 평평한 잔딧잎들에서 깊은 생명의 냄새가 풍겨 나오는 듯했다. 따뜻한 물 한 모금씩 목을 넘길 때마다 그 생명의 기운이 함께 타고 내 몸속으로 들어가 온몸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오후 내 엎드려 일한 고단함이 어디로 갔는지, 서울서 항상 목구멍에 느끼던 이물감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내 몸은 점점 싱싱해지고 있었다. 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여기는 정말 좋군.” 중얼거리며 혼자 웃었다. 밤에 나는 천연의 방음 속에서 오랜만에 숙면을 하였다. 꿈속에 나의 동산은 나오지 않았다.
아침의 새들이 합창을 하고, 해님은 밋밋한 뒷산에서 한 뼘이나 올라와 웃고 있었다. 서둘러 다시 중무장을 하고 정원 잔디밭 한가운데 서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두 시간쯤이면 잔디밭을 가지런히 할 것 같았다. 아침이슬에 젖은 잔디밭에 엉거주춤 앉았다, 또 작은 간이의자에 앉았다, 하면서 다년간 숙련된 손놀림으로 내가 존경하는 박완서선생의 단어인 “나도 잔디”라는 잡초들을 가차 없이 뽑아 나갔다. 해가 점점 높아지면서 잔디밭도 어느새 뽀송뽀송해졌다. 나는 이제는 아예 퍼더버리고 앉거나, 옆으로 기거나, 온몸을 잔디밭에 비벼대며, 혼자 중얼거렸다. “잡초와의 전쟁은 끝이 없군.” 그래도 내 기준에 어느 정도 이만하면 합격이라는 생각에 미칠 때까지 마지막에는 아예 잔디밭에 엎드려 손을 뻗어 잡초를 뽑아내다가 하늘을 향하여 바로 누웠다. 눈을 감았다. 어느 책에서 읽은 사람의 몸은 땅과 수평일 때 가장 편하다는 문구가 지금의 나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해님에 눈이 부셔 다시 처마 밑 테라스 위에 큰 대자로 벌렁 드러누워 파~아란 하늘의 햇솜 같은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엊저녁 어스름에 앞이 안 보여 풀 뽑기를 멈춘 구절초밭에 다시 달라붙었다. 밭으로 다가가면서 건너다 보이는 저기 길 건너 넓디넓은 비탈밭에서 최 씨 아저씨가 혼자서 구부정하고 한 고랑, 한 고랑 비닐을 씌우고 있었다. “저 넓은 밭을 언제 혼자 다 씌우지? 아니, 농부들은 베테랑이니까, 저쯤이야.” 나는 혼자 중얼거리다, 더 손을 재게 놀렸다. 한참을 하다가 다시 건너다본 비탈밭에 최 씨 아저씨는 여전하다. 높고 밋밋한 산으로 빙 둘러싸인 적막의 산속 마을에 단 두 사람만 호젓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의 힘은 역부족이어서 도저히 이 밭을 가지런하게 끝낼 것 같지 않았다. 힘에 부쳤다. 다시 엎드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 힘을 ~ 내!, 악 소리를 내며 거의 가지런하게 되어 보일 때 마지막 풀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그대로 퍼더버리고 건너편의 아저씨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얀 동산은 쉬이 오질 않는군!!!”
서울 청량리행 무궁화열차는 9분 늦게 영월역을 출발했다. 겨울의 계절이었다면 온통 붉은 석양의 하늘을 마주 보며 달렸을 텐데, 오월의 계절인 지금은 아직도 창가에 너무 눈부신 햇살이 찬란하다. 나는 “다음엔 좌측의 좌석으로 예매해야겠군,” 혼자서 중얼거리며 커튼을 닫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온통 하얀 동산 생각뿐이었다.
2025년 5월 28일 저녁에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