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綠山

8. 주재원 아내

by 신관복

북중 국경의 소도시 단둥(丹東)에 도착한 날부터 나는 주재원 아내라는 명칭을 얻었다. 2004년 6월, 두 달 먼저 도착한 남편이 있는 이 도시로 오기 위해 평양발-베이징행 국제열차에 아들과 함께 오르는 순간 느낀 얼떨떨한 환희는, 결혼과 함께 시작된 12년간의 대가족 시집살이에서 드디어 놓여난다는 안도감이었고, 또 국경 밖 미지의 도시 생활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었고, 이 두 감정이 마구 뒤섞인 벅찬 감정이었다.


단둥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단동무역대표부에서 마련한 저녁 식사 모임이 단둥 시내에 있는 옥류관에서 있었는데, 그때 모임에 참가한 주재원 부인들과 그 자녀들의 모습,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식탁 위의 음식들, 미모의 접대원들의 활발한 말솜씨와 율동을 하는 듯한 몸가짐에서 나는 난생처음 오,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라는 감탄과 더불어 오전 출국 시와는 다른,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 신세계에 대한 경이로운 환희를 느꼈다.


단둥의 주재원 부인들은 대부분 남편들의 무역사업이나 업무에 관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서류 업무를 도와준다든가, 출장에 동행을 한다든가, 대방(거래처)의 사람들과 식사한다든가, 단둥세관이나 단둥역에서 평양의 본사에 화물을 발송한다든가, 출국하거나 귀국하는 본사의 사람들을 일일이 맞이하거나 전송하는 일 등, 사실상 남편의 해외업무의 든든한 방조자였다. 실지 평양에서 여자들은 집안의 안사람이라는 고전적 명칭아래, 남편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참견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아니 참견해서는 안 되는 바깥사람의 일이었지만, 해외의 이 소도시에서는 여자의 내조가 절실했다. 평양에서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가부장적인 삶을 강요받던 여인들이 이 소도시에서는 주재원 아내로서의 당당한 지위로 거래처의 지극한 대접과, 시장 단골 상인들의 아부 아첨을 받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남편보다 더 강한 파워를 과시하는 난생처음의 삶을 맞이했다. 가끔 필요이상의 파워를 발휘해서 일어나는 부부갈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부인들의 작은 식사모임이나 찻자리에서 슬그머니 회자되곤 했다.


이 소도시 대방이나, 상인들은 주재원 아내들을 부르는 명칭이 남편의 성씨 뒤에 부인을 붙여 “장부인(張夫人), 차부인(車夫人)” 이런 식이었는데, 처음에는 내 성과 이름은 어디로 가고 남편의 성을 붙여 부르는데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중국의 생활문화가 그러한 것이고, 또 누구의 부인이기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여인이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는 듯하여 나름대로 이 부름에 익숙되어갔다.


해마다 7월 8일이 되면 동북 3성에 나와 있는 외교관들과 주재원들은 가족과 함께 총 출동하여 길림성에 위치한 길림육문중학교로 1박 2일의 여행을 하곤 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를 기차 또는 자동차로 13시간 이상 달려서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김일성 서거일을 기념하여 김일성동상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의 목적과는 달리 이 행사는 내 안목에는 부인들의 한복대결의 장으로 보였다. 어떤 부인들은 해마다 이날이 오면 모모한 한복집에서 새로 한복을 맞추곤 하였는데, 나도 내 한복뿐 아니라 단 한번 다녀온 평양 나들이 때에는 시어머니에 동서 것까지 여러 벌의 한복을 맞추어, 아마 그 한복집은 평양의 부인들로 인해 엄청난 돈을 쓸어 담았을 것이다. 생소한 남의 나라 땅에서 차대표네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이 행사를 계기로 같은 보안성산하 무역대표들의 소수의 부인네들과 소통하기 시작하였고 동부인하여 갖게 되는 여러 식사자리에서 더는 멀뚱멀뚱 어색한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부인들의 활약은 평양의 본사에서 주재원 소환이나 차기 주재원의 이름이 슬며시 거론되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통상적으로 임기만료로 소환이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귀국까지 6개월 정도의 말미를 주는데, 이때부터 부인들은 온 중국땅을 상대로 평양으로 가지고 들어갈 물건들을 구입하는데 열중하기 시작한다. 이 물건들에는 없는 것 빼고 다 해당이 된다. 가전제품, 가구, 온갖 살림살이, 의류, 아이들 학습도구 등, 이렇게 구입한 물품들은 미리 수차례에 걸쳐 단둥역에서 화물로 붙여져 평양으로 보내진다. 국경을 넘는 이삿짐들이다. 너무 철저한 부인들은 마지막 귀국길에 일개월정도 소비할 식품들까지 꼼꼼한 포장을 해서 열차에 싣고 간다고들 했다. 나는 어떤 부인이 어마어마한 양의 계란을 포장하여 화물로 붙였다는 이야기에 뭐 그렇게까지 하지? 입을 쩍 벌렸다. 이건 이사가 아니고 수입이라고 해야 옳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해외에서 수년~길게는 10여 년을 살던 부인들은 귀국하여 살아갈 평양에서의 생활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낀다고 했다. 왜냐? 그녀들은 99.9%가 나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평양의 0.001%에 해당되는 상류층 집안의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상류층들의 최고의 목표가 외교관이나 해외 주재원으로 가족을 동반한 해외에서의 삶이다. 이 목표는 대를 이어 계승되어 그 부모에 그 자녀, 그리고 손자의 대에까지 거리낌 없이 이어진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확률은 하늘의 별따기가 오히려 수월할 정도이다. 조선시대보다 더 철저하고 악랄한 계급사회의 진면모이다.


주재원부부들의 해외살이에서 가장 큰 고민은 자녀들의 학업과, 평양으로 소환 후의 그 애들의 진로이다. 과연 해외에서 자유와 풍요로움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귀국 후 평양의 학교생활에 적응할지부터가 물음표이다. 그 애들은 부모들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북한당국의 교육과 그 내용에 대해 부정하고 그 사회에 대한 비방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머리만 큰 아이들 때문에 주재원들의 노심초사는 온갖 뇌물작전과 편법의 동원으로 이어져, 고등학교과정을 마친 아이들은 부모의 임기 중에도 귀국시키는 것이 당국의 방침이지만 성년이 되어서도 부모들과 함께 또는 다른 도시에서 해외에 거주하며 대학생활까지 하는 아이들이 수다하다.


0.001%에 속하는 상류층 집안도, 일류대학출신도, 무역이나 경제학과 출신도 아닌 평범한 공대출신이었던 남편의 해외발령으로 얼떨결에 주재원 아내가 된 나는 그 시절 평화롭고 따뜻한 삶의 어느 한 구석에 항상 도사리고 있던 서늘함에 오싹함을 느껴 진저리가 쳐질 때가 문득문득 있었다. 소환명령을 받아 귀국준비를 하던 어느 주재원부부가 사는 맞은 켠 아파트의 베란다에 쌓여가는 귀국물건들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때가 올까? 도대체 평양으로 돌아가기는 할 수 있을까? 우리 부부는 암묵 속에 각자 같은 생각을 늘 품고 살았고, 그 생각은 드디어 차기 주재원 후보의 이름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의 귀에 들려오면서 확고한 결심과 행동으로 이어졌다. 나약한 마음과, 무서움에 못 이겨 어느 날 저녁에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우리도 남들처럼 귀국했다가 다시 뇌물작전이든, 뭐든 해서 다시 발령받아 나와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남편은 단호히 거절했다. 다음은 없다고.


1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2시에 남편의 광저우 출장을 빌미로 우리 부부는 단둥제6중학교로 차를 몰아 그날 진행된 학급별 합창경연무대에서 내려오는 아들을 태우고 선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그 전날까지 나를 짓누르는듯하던 무섭고 서늘한 감정은커녕 뜻밖에 홀가분한 마음을 느꼈다. 아, 이것이 자유인가? 차 안에서 남편은 단동무역대표부 안전대표에게 내일 토요일 당생활총화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화로 말하고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 지금부터 일요일까지 3박의 시간이 있었다. 월요일이면 우리는 제3 국의 땅에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평양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고 되고 싶어 하는 주재원 아내의 허울을 벗어던졌다.


우리 세 가족은 이렇게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금부터의 삶은 신께 맡기고.



2025년 6월 22일 일요일에 신관복 쓰다.


여름의 시골집 녹색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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