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 4.
만삭의 몸으로 저녁 설거지거리가 쌓인 부엌 싱크대 앞으로 식기들을 닦으려고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배에서 통증을 느꼈다. 여느 날과 같이 저녁밥을 준비해서 식구들 식사시키고, 방금 빈 그릇들이 물러 나와 설거지를 하려던 참이었다. 오전에 방앗간에 쌀 찧으러 갔다 와서 부푼 배가 땅겨서 그런가? 하고 잠시 부엌 바닥에 편히 앉아 보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일어나 몇 개의 그릇들을 닦았는데 또 같은 통증이 왔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왜 배가 갑자기 아프지? 손을 씻고 안방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보던 남편은 누워서 조금 안정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한동안 통증이 없었는데 또 같은 통증이 시작되었다. 스물네 살의 어린 임신부였던 나는 그것이 해산진통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다. 거의 같은 시간의 간격으로 통증이 왔다. 한 대여섯 번의 통증이 반복되어서야 남편과 나는 설마 아기가 지금 나오려고 진통이 시작된 건가 하며 동시에 달력을 쳐다보았다. 해산예정일까지 11일이 남아있었다. 설마?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피아노 레슨으로 어머님은 아직 출타 중이었고, 아버님과 시동생은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진통이 오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남편과 나는 부랴부랴 진통이 없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옷을 꿰어 입고 출입문을 열어젖히는데, 집으로 들어오시는 어머님과 마주쳤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가냐는 어머님의 커진 눈빛, 진통이 시작되어 지금 산원으로 간다고 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 오고 있었다.
집에 전화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병원 응급실까지 환자와 보호자가 가야 했고, 환자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면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에게 왕진을 청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1992년 7월 10일 밤 10시쯤에 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 금성 2동의 집에서 남편은 진통에 걸음을 거의 걷지 못하는 나를 부축해 평양산원을 향해 출발했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그래도 아직 궤도전차가 운행 중이었다. 겨우 막차를 면하고 전차에 올라타 통증으로 배를 그러쥐고 정신없이 가쁜 숨을 내쉬는 나는 거의 주위를 의식하지 못했지만 전차 안에 꽤 사람이 많은 것을 느꼈고, 내 주변 동승자들이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은 뿌옇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차는 대동교를 건너 강 건너 사동 쪽으로 향하지 않고 평양역광장에서 회선 한다고 평양역 앞 정류장에서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켰다. 남편은 나를 거의 반 안다시피 팔을 끼고 광장중앙의 교통안전원에게 다가가 급한 상황을 말하며 산원까지 아무 차라도 태워달라고 큰소리로 정중하게 말했다.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는 차도 드물어 얼마간 기다린 끝에 대동강구역으로 강 건너가는 승합차에 올라 거의 12시가 다 되어 평양산원에 도착했다.
해산진통이 이미 시작되어 나의 입원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이까지 합친 몸무게가 49kg이라는 것만은 정확히 기억했다. 이리저리 나를 부축해서 데리고 이런저런 검사와 소독을 하고 아이 낳을 준비를 시켜주는데 나를 만지는 간호사들의 손길이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아마 해산실이었는지 어떤 방의 침대에 나를 눕혔다. 침대가 여럿이었는데 진통으로 신음하는 여러 임신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사가 가끔 나와 다른 침대를 들여다보며 상황을 체크했다. 진통의 와중에도 남자의사를 의식하며 진저리를 쳤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이를 악물고 가늘게 신음하고 있는 나를 드디어 해산침대에 올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나의 손에 어떤 가죽손잡이를 쥐어주었다. 눈을 떠보니 나이 지숙한 여의사였다. 드디어 아기의 머리가 보인다고 했다. 이제부터 자기가 신호할 때에만 힘을 주라고 했다. 신호를 잘 못 지켜 갑자기 힘을 줄 때면 측면에 서있던 간호사가 내가 꽉 틀어쥔 손잡이를 떼어내느라 애쓰는 듯했다. 나는 어느 순간 온몸의 힘이 아래로 몰려가는 느낌을 받으며 손아귀를 틀어쥐고 악 소리를 질렀다. 물컹하는 느낌과 함께 그렇게 뼈가 물러 내리는 것 같던 진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아들입니다 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정각 6시, 1992년 7월 11일 새벽이었다. 나는 스물네 살 어린 나이에 나와 두 바퀴 띠 동갑의 건강한 아들을 평양산원에서 낳았다.
아침에 새로 출근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를 인계받아 꿀 한 컵을 먹여주고, 뒤처리를 해주고, 이동침대에 눕혀 입원실로 밀고 가면서 나의 차트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집이 작아 아이가 아이를 낳았나? 의구심이 들었던 것 같다. 24시간 동안 나는 잠의 수렁에 빠져 아기와 만나는 시간까지 내내 꿈나라에 있었다. 병실의 내 침대 발치에 아기침대가 봉긋이 솟아 있었다. 드디어 아기들을 태운 밀차가 도착해 엄마의 팔찌 번호를 부르며 아기를 안겨 주었을 때 나는 엉겁결에 나의 아기를 품에 안고 그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린 나는 이렇게 엄마가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이제 22개월 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평양산원에서 태어난 아들은 서울에서 태어난 딸의 아빠가 되었다.
북과 남에서 태어난 내 아이들의 삶이 무탈하기를!
2025년 7월 11일 아들의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으며. 엄마 신관복 쓰다.
더 씀.
평양산원에서 아들이 이 세상으로 나오려고 태동하던 그 시간에, 온몸에 소나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인적 없는 대동교를 건너 두 시간이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던 남편은 이제 멀리서 이 아이들을 비추며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