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피아노곡에 대한 사랑
내 아들이 두 살 되던 해인 1994년 봄에 그이의 어머니 조태란여사는 그토록 소원이던 러시아제 대형 피아노를 드디어 집에 들였다. 러시아에 외교관으로 나가있다가 귀국한 한 레슨 제자의 부모와 교섭이 잘 되어 그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엄청난 거금인 500달러에 잘 사들였다는 사연을 그이에게서 들었다. 이때부터 내 아들은 물론 온 집안 식구들은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조태란여사의 피아노 연주를 늘 들으며 살았다. 어떤 날 늦은 밤 시간까지 그칠 줄 모르는 피아노소리에 그이의 아버지께서는 이웃들과 식구들 생각도 좀 하라시며 좋게 만류하곤 하셨다.
정말 오랜만에 나를 보러 우리 집으로 찾아온 소녀시절 동무가 조태란여사의 피아노연주를 들으며 안방에서 나와 대화하던 중 문득 물었었다.
너의 어머니 머지않아 피아노독주 공연에 나가냐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연습하는 거야, 하루라도 안 하면 손가락이 굳어지는 거래.
근데, 너 저 곡이 무슨 곡인지 아니?
쇼팽의 무슨 곡이라는데, 매일 똑같은 곡만 스무 번도 넘게 치셔, 내가 다 외웠다 얘.
책을 사랑하여 문학을 꿈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자자동화공학과를 나온 나와, 원하지 않았지만 생물학교수인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여 생물학과를 나온 내 소꿉친구는 음악의 무뢰한에 걸맞은 이런 대화 끝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며 싱긋싱긋 웃었었다.
내 아들은 두 살부터 할머니가 연주하는 피아노 발치에 앉아 장난을 하거나, 피아노 페달 밟는 할머니 다리를 그러안고 있거나, 그러다 졸음이 오면 그대로 누워 잠을 자거나 하며 일상을 피아노소리와 함께 하며 자랐다. 아들이 다섯 살 즈음에 청음테스트를 실시한 조태란여사는 당신의 손자가 절대청음을 소유한 신동이라는 표현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과 함께 즉시 개시한 신동의 피아노레슨은 도레미파솔 다섯 개 음을 이틀 동안 반복 주입한 끝에 너무 어려서 이년 더 있다가 시작해도 좋겠다는 기분 좋은 계획으로 막을 내렸다.
아들이 일곱 살 되던 해인 1999년은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이라는 명목아래 너도 나도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말 그대로 고난의 시기였다. 조태란여사는 이 어려운 나날에 손자의 피아노공부를 위해 지인인 노부인을 집에 피아노선생으로 들여(할머니를 선생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밤낮으로 붙잡고 도레미파솔을 완성하게 하였고, 얼마 후 본격적으로 바이엘을 시작하여, 소나티네까지 연주하게 되었다. 발이 페달에 닿지 못해 작은 의자에 발을 올려놓은 꼬마의 손이 피아노건반 위로 나는 모습에 조태란여사의 지인들과 친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조태란여사는 레슨 하는 제자의 집에 한사코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 그러나 이렇게 오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연습이 생명인 피아노공부에서 내 아들은 늘 할머니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했고 저녁마다 내려지는 아버지의 엄한 꾸중과 벌을 무서워했다. 나는 어떤 때에는 부엌에서 잠자코 있지 못하고 꾸중과 벌로 무서움에 떠는 아들을 안고 안방으로 달아나면서 외치곤 했다.
피아노 그만 시키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이때마다 온 집안 식구에게 같이 외치는 조태란여사의 말
그게 다 애를 위한 거라고, 나중에 사람들 모임이나 큰 회의 장소에서 아무리 똑똑한 앤들 나서서 나 수학문제 잘 푸오, 하며 수학문제 풀어 보일 거냐고, 피아노 한곡 연주하면 끝장날 것을.
조태란여사의 이 말의 정당성은 아들이 자라고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아들의 피아노레슨은 그이가 발령받아 나온 단둥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그이의 결단으로 아들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를 영원히 만나볼 수 없는 여기 서울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서울에서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며칠 안 된 어느 날 진행된 반회장 투표에서 뜻밖에 압도적 투표결과로 반회장으로 선출된 이유가 피아노를 치는 수준이 아니라 연주(반 학부모들의 말에 의하면)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원서를 준비하기 위해 담임선생에게서 받은 학생생활기록부에도 단연 눈에 띄는 대목이 음악과목 악기시험시간에 연주한 모차르트의 무슨 피아노곡의 연주에 대한 문장이었다. 대학시절에도 장기 자랑하는 모임에서 아무런 장기도 없어 우물쭈물하던 아들은 본인의 이름이 거론되자 무대에 놓여있는 피아노에 마주 앉아 늘 치던 클래식은 김 빠질 것 같아 아주 빠른 한 곡 연주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쑥스럽게 그 자리를 모면했다고 나중에 슬그머니 들려주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아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까지 할머니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조태란여사의 말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피아노만 한 곡 치면 누구나 즐거워하고, 좋아했고, 인정해 주었다.
그이가 암 투병을 했던 3년 4개월의 기간 동안 가장 행복해하고 편안해했던 시간이 어쩌다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소리를 듣는 순간이었다. 투병 전 일상의 생활에서도 이 시간을 좋아했었지만 투병기간에는 “아, 아들 피아노소리 너무 좋다, 행복하다.” 어떤 때는 “눈물이 난다.”라고 감동 어린 표정과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연신 돼 내이며 박수를 오래오래 치곤 하던 그이의 모습에서 나는 조태란여사를 떠올렸다. 그이는 간간히 주어지는 이 짧은 시간에 피아노 앞의 아들의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곤 하였으리.
내가 조태란여사와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곡 중 가장 편안해하고 사랑했던 곡이 “작은 새의 저녁 노래“라는 곡이었는데 들으면 피아노소리가 정말 고요한 저녁에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이 들려 아들이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하면 늘 신청하곤 했던 곡이다. 새들은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한 곳에 모여 노래하듯 지저귀다 노을이 저물면 잠든다고 하는데 이 피아노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 광경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며 펼쳐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아직도 무더운 여름날, 주말이지만 더워서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창가에 서서 이따금 지는 햇빛에 동체인가, 날개인가 반짝이며 동쪽인지, 북쪽인지 먼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들을 세어보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 생각에 나도 작은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강렬한 생각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이와 그이의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여보,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는지요? 두 분 옛날처럼 같이 잘 지내고 계시지요?
그이가 떠난 후 아들은 아예 피아노뚜껑을 닫고 커튼 같은 씌우개를 덮어버렸다. 그 뚜껑이 열릴 날이 언제인지 기약할 수 없는 요즘이다. 피아노뚜껑을 열지 않는 아들의 마음도 알 수가 없다. 아들의 가장 큰 스승이었던 할머니와 클래식 곡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언젠가 나는 아들이 연주하는 작은 새의 저녁 노래를 들으며 눈감고 옛날의 우리 집을 떠올릴 것이다.
2025년 8월 24 일요일 무더운 여름 오후에 신관복 쓰다.
미흡한 이 글을 내 아들의 스승이었고, 그이의 어머니인 조태란여사에게 바친다.
불효한 며느리의 작은 이 글을 받아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