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
산으로, 들로, 시냇물로 천방지축 자연을 동무 삼아 하루 낮 종일 지치지도 않고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오솔길에 고무신을 벗어 베고 혼곤히 잠들어 버리던 개구쟁이 소년이었습니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던 길에 연꽃 위에 붙어있는 왕잠자리 잡으러 등굣길 깜빡하고 가방을 멘 채로 온몸을 날려 연못에 뛰어들던 열정의 소년이었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 결석한 날 같은 반 친구들이 우르르 집으로 찾으러 오면 들통 가득 물을 떠서 출입문의 위 창을 열고 그 애들 머리 위로 쏟아붓던 못된 장난꾸러기 소년이었습니다.
중학교 악기소조시절 참하고 아리따운 첼리스트 동갑내기 소녀를 짝사랑하면서 정작 한마디도 고백하지 못했다던 홍안의 부끄러운 소년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미술대학 전문부 입시에서 낙방하고 울면서 담임선생을 찾아가 항변했지만 본인보다 그림 실력이 부족해 따라다니며 도와달라 애걸하던 친구가 합격한 똑 부러지는 이유를 들을 수 없어 그때부터 말수가 적어지고 마음의 방황이 시작되었다던 갓 열여섯의 어린 청춘이었습니다.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서 8년이나 추위와 배고픔, 산전수전 다 겪으며 군사복무로 청춘의 좋은 시절 아깝게 흘러 보내며 이 청년이 깨달은 것은 그 땅에서의 탈출이었습니다.
동기훈련 기간의 그 엄혹한 겨울, 모포 한 장으로 온몸을 휘감고 언 땅을 파서 만든 차디찬 좁은 공간에서 추위에 떨며 이를 악물고 품었던 그 탈출의 길은 아득했고 너무 험난했지만 청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스물네 살의 그 시절부터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의 그 험난한 길 위에서 당신은 늘 탈출이라는 거대한 폭풍우를 마음에 품고 걸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아내에게도 꺼내 보이지 못했던 마음의 말들을 아기 낳고 처음으로 북쪽 끝 백두산자락의 정일봉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우리 둘이 같이 지원해 가자는 표현으로 끄집어냈고 영문을 모르는 어린 아내는 태어난 지 4개월밖엔 안된 아기를 바라보며 울기만 했었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 당신의 운명이었을까.
그 모진 폭풍우의 길을 이십 년이나 걸은 끝에 당신은 마흔네 살의 중년의 나이에 너무 뜻밖에 공식적으로 그 땅을 탈출했습니다. 아내와 아들도 데리고, 해외주재원이라는 직함으로.
이십 대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산 폭풍우가 이젠 잠잠해지고 고행도 끝나고 그냥 평탄할 길 위로만 걸을 것 같았는데 새로운 태풍이 더 큰 폭풍우를 몰고 와 당신이 가는 앞길에 회오리치며 극성을 부렸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탈출의 그 길 끝에 당신이 마주한 것은 북쪽 땅에 남겨두고 떠나온 부모님에 대한 죽어서도 갚을 길 없는 불효의 죄스러움이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너무 잘 먹고, 잘 입고, 잘 지내는 것이 죄스러워서 당신은 늘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소박하게 살자고.”
그리고 아들에게는
“너는 꼭 잘 살아야 한다고, 이북의 가족들에게 죄 되지 않게.”
마음속에 그렇게 오랫동안 회오리친 폭풍우의 힘에 당신의 육체가 이기지 못했을까, 이 땅에 온 지 16년밖에 안 되어 예순두 살의 황금의 나이에 당신은 훌훌 다 털어내고 어느 날 홀연히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좋은 땅에 개구쟁이 소년으로 태어나, 짓궂은 장난꾸러기 소년으로, 동갑내기 예쁜 첼리스트 여자애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홍안의 소년으로, 천성으로 잘하는 그림 그리기로 미술대학 전문부에 덜컥 합격한 행복한 소년으로, 국방의 의무를 멋지게 실행하는 늠름한 청년으로, 폭풍우가 아닌 사랑만을 품고 살아가려고 그렇게 서둘러 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진실로 전생과 후생이 있다면 나는 그 소년의 엄마로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내가 살아낸 지금의 생에서 아쉬웠던 모든 것들을 그 소년에게 아낌없이 주며 항상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습니다.
문득문득 스치는 이 그리움을 내가 언제까지 감내하고 살아야 할까요?
개성의 송악산이 멀리 보이는 연천의 햇빛 찬란한 어느 산등성이에 당신은 한 그루의 푸른 소나무가 되어 서 있습니다.
“여보, 그곳은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가요?”
2025년 추석날에 당신이 평생 아껴주던 당신의 아내가.
더 씀.
이 작은 산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자작나무에 서각 해주신 벽산 고진국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