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사람들
우리 부부가 영월의 아늑한 어느 시골마을에 덜컥 보금자리를 마련한 특별한 이유를 묻는 지인들이 여럿 있었다. 그 물음들에 나는 잠깐의 생각 끝에 답하곤 했다.
“산세가 억세고, 장해 보여서요.” 또는 “한강의 시원이 이 고장이라고 해서요, 그리고 무엇보다 집의 터전이 네모나고 평평해서요.”
처음 이곳으로 올 때 이 고장으로 가까워질수록 고속도로 차창 밖으로 펼쳐진 산줄기들은 마치 서로 나란히 봉우리를 향하여 웅크리고 엎드려있는 거대한 킹콩들의 등을 연상시켜,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주야장천 맴 돌 듯 살아온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와와 소리만 질렀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남편은 이 고장에 대해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자세히 연구한 끝에 나와 아들에게는 물론이고 친지들과 지인들에게 늘 이야기하기를, 이 고장이 조선중기 예언서인 정감록 10 승지에 속하는 안식처라서 혹여 전쟁이 나거나 전염병이 퍼지는 난세 때에는 우리 영월집으로 피난 오라고 정색해서 말하곤 했다. 전쟁은 아니었지만 코로나가 범람하던 그때에 우리 부부는 이곳 적막한 시골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난세를 조용히 지나 보냈었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3년 정도 살았는데 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나날동안 자연의 시간과 계절의 바뀜, 그리고 살아있는 온갖 생물들을 느끼고 관찰했고, 중요하게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나보지 못했던 이런저런 시골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삶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자연의 시간에 따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물들이 지천에서 돋아나면 해가 쟁쟁한 마을의 밭이나 산등성이에는 수다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나이 지숙한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네들의 손은 잽싸게 땅속의 나물들을 부지런히 낚아 올리고 있었다.
시골에 살면서 지금까지 먹어온 감자와 고추와 옥수수와 배추와 무, 그리고 수많은 채소들을 심는 계절의 시간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가꾸는 농부들의 마음으로 그것들이 좋아하는 빛과 물, 그리고 바람을 같이 느끼며 한 계절을 맞고 또 다음 계절을 기다렸다.
태반이 그곳이 고향인 마을사람들은 혹 천성으로 막 돼먹고 여기저기 거짓을 퍼뜨려 불신을 조장시키고 불편을 초래하는 나쁜 인간이 한둘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뚝뚝하지만 선량하고 자기 집 농사일에 전념하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에 묵묵히 힘을 보태고 해결하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고장에서 한국에서의 두 번째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꽃차를 만들고 지역 어르신들의 일자리창출사업을 맡아하는 사회적 기업 화이통협동조합이었다.
그 회사의 내 좋은 동료들은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들로 남았다.
출근한 지 단 두 달 만에, 일 년 몇 달 동안이나 나의 몸에 머물렀던, 자칫 장기화될 수 있었던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내 몸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는데, 그 병세가 물러가는 느낌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첫 느낌은 목구멍으로 그렇게 넘기기 힘들던 밥이 어느 날 술술 잘 넘어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 느낌은 내가 언젠가부터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어느 날 하하 호호 동료들과 농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었다. 세 번째 느낌은 까맣던 얼굴빛이 밝아지고 볼에 살이 붙고 말랐던 몸의 체중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 시절 암 투병 중이었던 남편에게도 나의 이 좋은 기운이 흘러가 암울했던 우리 부부의 시골집에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화사한 봄의 따뜻함이 감돌았고, 출근하는 나를 따라 남편은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마을길을 걸어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하는 일이 일과의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었다.
그이가 떠나고 일 년 육칠 개월을 더 그곳에 머물렀다. 여자 홀로의 몸으로 산골에 들어앉은, 그 큰 시골집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서 짐을 싸가지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 정든 사람들을 뒤로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골집 앞 정원과, 잔디밭과, 집 뒤쪽의 밭들은 늘 해야 할 일거리투성이어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울과 영월집을 오고 가며 집도 보고, 그곳의 정든 사람들과도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설 연휴 끝에 나의 사랑하는 영월은 실로 오랜만에 화사한 봄을 맞았다. “왕과 사는 남자“ 한 편의 영화로 그곳은 몇십 년 만에 사람들로 흥성이는 고장으로, 연일 TV뉴스와 인터넷매체에 이름을 날리는 고장으로 각인되고 있고, 4월 말에 있을 단종문화제는 역대급 흥행을 예고하고 있다. 이 화사한 봄의 기운으로 나의 정든 동료들의 회사도 연휴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오랜만에 경기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하니, 이 상황에 정말 감사하고, 이 기운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비운의 단종대왕께서 당신의 유배지인 마음 시렸던 고장에 따뜻한 봄을 가져다주셨는가?
아침햇살이 내 집 지붕과 잔디정원에 퍼지는 것과 동시에 밖으로 나와 정원 한복판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 내 몸속은 물론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신선한 공기가 속속들이 들어차는 느낌은 그곳에서만 가능한 자연이 주는 특혜였으며, 지금의 번잡한 서울살이 도중도중 눈감고 떠올리는 소중한 느낌의 추억이다.
내 평생의 옆지기와 함께 마지막 3년을 살았고, 또 그이를 떠나보낸 고장, 나의 정든 그네들이 사는 고장, 서울 사무실 책상 앞에서 자판기를 두드리다가도 눈감고 떠올리는 그이의 손길이 살아있는 시골집이 있는 고장, 영월의 올봄은 유난히 화사하고 따뜻하리라!
2026년 3월 8일 해가 쟁쟁한 일요일 오후에 신관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