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로 가고 싶다
올겨울 나의 집 정원과 집 뒤 켠 밭은 푸지게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이어 그 하얀 모습이 겨우내 변함이 없다.
오늘은 소한 음력 12월 보름이다.
뒤 산 밋밋한 능선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둥근 보름달에서 내려온 빛이 내 집 마당가에서 하얗게 뒹글고 있어서 밖은 부드럽게 보인다. 그가 나를 뒤로 하고 떠난 후 처음으로 맞는 그의 생일이기도 하다, 63번째 그의 생일. 예순셋이라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내가 그 숫자의 나이가 되려면 몇 년의 숫자가 필요한지를 단순하게 셈해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들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엷어진다더니 몸은 멀어졌음에도 마음은 함께 있던 시절보다 더 자석처럼 그에게 들어붙는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에 자리 잡은 내 집의 침실에 누워 가끔 컹컹 울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캄캄한 천장을 응시하며 잠들기 전 나는 매일 옛 시절, 젊은 날들을 헤매군 한다.
여름에는 노란색 와이셔츠 위에 짙은 녹색의 조끼원피스를 입었고 봄가을이 오면 그 위에 단추 세알 달린 같은 녹색의 양복저고리를 입었다. 이것이 나의 대학시절 교복차림이었다. 그는 같은 녹색계열의 바지에 양복저고리였는데 안에 흰 와이셔츠나 연한 베이지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었었다. 80년대 후반 20대였던 그와 나는 그 시절 이런 차림으로 하교 길에 한 손엔 책이 많이 들어있는 대학생 들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서로 맞잡고 타인들의 시선을 피하여 모란봉의 으쓱한 산길이나 대동강변의 한적한 오솔길을 설레 이는 마음을 누르며 걷곤 했었다.
강바람에 머리칼을 맡기고 비릿한 강물냄새를 맡으며 그와 손 맞잡고 89년 여름 세계청년학생축전의 개막식을 위하여 능라도 섬에 새로 건설되고 있던 활짝 핀 목란꽃 모양의 5.1 경기장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서 있던 날도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장난기가 많아서 나를 은근슬쩍 골려먹기를 잘했다.
나는 그 시절 처녀로서의 흠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단순한 자존심에 근시안이었지만 안경을 쓰지 않고 지냈었다.
인민대학습당의 몇 층 몇 호 강의실에서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 먼 곳이 잘 안 보이는 내가 그를 찾아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어정거리고 있을 때 매의 눈이던 그는 우스워 죽겠는 양 살금살금 내 뒤를 따라다니며 키득키득하군 했다. 획 돌아서서 마주치며 앵돌아졌다가도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인민대학습당 앞의 푸른 잔디밭에 앉아 싸가지고 온 점심을 같이 먹고 나면 나의 마음은 부드러워져서 또 본래의 나로 금세 되돌아오군 했다.
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리던 그해 여름 나는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원피스를 입었었다. 그의 어머니가 나의 몸치수를 직접 재서 재단하고 재봉질 한 그 화려한 색깔의 원피스를 입고 평양역 앞 광장거리의 매점에서 과자며 사탕이며 과일음료를 판매하는 대학생봉사단으로 있는 나를 보러 역시 대학생규찰대원으로 경찰들과 거리를 누비던 그가 매일 저녁 찾아와 옆 지기 아주머니들과 너스레를 떨 군 했다. 그러면서 같은 매점 봉사원이었던 나와 동갑내기 경공업대학 남학생을 경계의 눈초리로 위협하기를 잊지 않았다. 지금 그 남학생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가 있으면 바로 물어볼 테고 그는 바로 대답해 줄 텐데, 나의 젊은 시절의 갈피갈피를 공유할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가 지금 내 곁에 없다. 그가 떠난 후 내가 가장 막막하게 생각된 것은 더는 나의 풋풋했던 대학시절과 청춘시절을 같이 추억해주고 서로 기억나지 않는 이름과 장소, 그리고 재밌었던 일화들에 대해서 일깨워 줄 유일한 사람이 이 땅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처럼 상세하지는 않아도 우리들의 청춘시절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들은 38선 너머 이북에 있고 나와 그의 단 한 점의 혈육인 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나날들이었기에 나의 이 막막함은 더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의 생일인 오늘 이 땅에 와서 그의 유일한 벗이었던 심형의 진심 어린 추모메일을 받고 하루 종일 눈가가 축축해서 있다가 저녁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 길로 마음껏 통곡했다. 산속 집에 홀로 지내는 나의 자유였다.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와 나의 청춘시절은 바람처럼 휙 지나가버렸지만 그 짧은 시절 속엔 강렬함이 들어있었고 미지의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그리움과 동경이 들어있었다.
그와 내가 이미 지나쳐온 세월 저쪽 어딘가에서 그는 다시 나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다. 나는 그가 도대체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바람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되어 그와 함께 했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먼 옛날 어느 시절의 그를 발견하면 기쁨에 겨워 그곳에 멈추어 우우 소리쳐 부르며 회오리로 그를 감돌며 내가 왔다고 동동 구르고 싶다.
2023년 1월 6일 신관복.
당신의 예순세 번째 생일을 기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