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겨울밤의 생각

by 신관복

돌아올 사람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다.

주위는 정적만 흐르고 겨울밤은 깊어만 가고 있다.

옛날 일기장 뒤적거리며 그와 함께 있던 시절의 행복했던 나의 사치한 고민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가 청춘시절 그렇게 소원이었던 어학연수를 50이 넘은 나이에 한다고 무작정 캐나다로 떠나 일 년 동안이나 내 곁에 없었던 그해 겨울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드라마의 주인공이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갑자기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보고 황급히 그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어디냐고.

갑자기 무슨 일 있냐고

아니 됐다고, 목소리 들었으니

목소리 못 들었으면 숨 막혀 버릴 거 같았다고.

...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 혼자서 집에서 소주 반 병을 마시고 꼬꾸라졌었다.

이 세상 그 어딘가에 그가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은 의지가 되고 든든했던 8년 전의 나였다.

올해 겨울밤의 덩그런 나의 시골집에 덩그마니 홀로 앉아 이 책 저책 뒤적거리다 낡은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몸이 옹송그려지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하면서 지나가버린 그 시절이 너무 애틋해진다.

KakaoTalk_20221220_194931051.jpg 2004년 그의 여권


록산 무역 단동 지사 주재원 시절 소환을 6개월 정도 앞둔 2006년 12월 사선을 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평탄했지만 그와 나의 의지와 판단으로 여러 비행기를 갈아타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하기까지의 긴장됐던(내 나름으로) 이야기를 써놓은 것을 읽으며 그 해 겨울엔 눈이 많이 왔었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12월에도 여름이었던 그곳에서 말레이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원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온몸에 엄습해 왔던 추위에 몸을 옹송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빙빙 돌아가는 캐리어들을 바라보며


어디 불편하세요? 하는 물음에

너무 추워요.


라고 말하던 16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그때에도 양옆에는 그와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겨울 나는 많이 울었다. 눈은 항상 부어있었고 얼굴도 늘 부운 듯했다.

그것이 그리움의 시작 임도 그땐 몰랐다.



더 거슬러 올라가 그와 내가 대학시절, 그리고 결혼 후 평양을 떠나기 전 아들이 열두 살 되던 해까지 그는 내가 원하는 곳에 항상 있었다.

대학시절 강의실에서 그는 두 줄 건너 내 등 뒤에 언제나 자리하고 앉아 있었고, 추가 강의가 늦게 끝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하교 길에 그는 항상 내 뒤에서 말없이 걸어왔었다.

6개월간의 대학생 고사포 중대 근무 시절

‘비상’이라는 명령에 포진지로 헐레벌떡 잘 뛰지 못하는 나의 등 뒤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달리다 넘어지면 우악스럽게 안아 일으키는 그의 손이 있었다.

또 연애 금지이던 대학생활이 너무 슬프고 마음이 힘들어 울며 헤매던 평양의 거리마다 항상 그가 있었다.

애인 없는 여학생 동기들이 마냥 부러웠던 그 좋은 청춘의 나날들에 그가 항상 있었음에도 나는 늘 울며 지냈다.

번개 불에 콩 볶듯이 대학 졸업 후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던 그 해 겨울 1991년 겨울은 너무 추웠다. 결혼과 동시에 찾아온 극심한 입덧에 그 추운 겨울 나는 두껍게 옷을 입고 시댁에 중환자처럼 누워 지냈다. 그는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아기 낳고 결혼 초기 직장생활 시절, 궂은날이면 어느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그는 나의 직장 정문에서 퇴근시간 기다렸다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태우고 집으로 가군 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모교의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고 그의 지위도 많이 올랐던 2001년 내가 갑자기 연구실에서 직원들과 담화 중 쓰러졌을 때 그는 회사 벤츠를 몰고 대학으로 달려와 나를 의대병원 응급실로 싣고 갔었다.

그는 항상 내가 원하는 곳에 있었고 내가 원하는 때에 나타나군 했다.

나는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외롭지 않았고 이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쭉 계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울에서나 여기 시골에서나 내가 원하는 곳이면 그는 언제든지 나타났으며 늘 함께여서 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다.

그가 떠난 지금 그와 함께 했던 지금까지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겨우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너무 익숙한 것에 익숙되어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되지 못하고 있다.


침대 머리맡에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을 항상 놓고 들여다보다 잠들 군하는 버릇이 생겼다. 선생의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아득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간 선생의 시.

내가 특히 좋아하는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그가 떠난 자리를 책들이 메워주고 있다.

선생의 말처럼 춥고 긴 겨울밤 산속에 들어앉은 이 덩그런 집안에서 적막과 책만이 나를 지켜 줄 것 같다.

책이여 말없는 벗이여.


‘칼의 노래‘를 선물해준 金에게 감사의 인사드려요.


2022년 12월 동짓날 신관복

KakaoTalk_20221220_212317433.jpg 나의 집 뒤쪽 사과나무밭에 밤새 누군가가 왔다간 흔적이 있다. 어떤 동물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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