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일기장] 조심히 가세요, 할머니!
아끼는 후배랑 기분 좋은 오후 수업을 가는 날이었던 것 같은데요.
1호선 지하철 환승 갈림길 앞이 곧 쏟아지기 일보 직전, 할머니가 말을 건네십니다.
용산에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타냐고 여쭈어 보시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갑자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할머니를 용산으로 모셔드릴 지,
소요산으로 모셔드리고 평생 먹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지, 선택해야 합니다.
느적느적대다간 양 방향 기차와 사이좋게 작별인사도 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잠깐의 순간을 빌어 전철 안내판에 써있는 '청량리'가 보입니다.
반대편은 '인천', 용산은 단 한 마디도 써있지 않네요. 진짜로 망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르는 여기는 동대문. 용산은 이보다 한참 지도의 아래라는 정보가 머리에 스칩니다.
얼른 인천을 가리키고 서둘러 어플리케이션으로 확인 사살까지 한 후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를 잘 모셔드립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도록 강요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다익선의 법칙입니다. 많이 알 수록 좋고, 많이 가질수록 좋다고 합니다.
잠깐의 시간도 쉬지 말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하고요.
높이 쌓인 책, 용량이 터질 것 같은 아이패드, 속옷이 붙어먹을 만큼 앉아있는 시간,
노력의 결과이고 승리의 지름길이라는 통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짧게 반짝이는 찰나가, 가끔은 뜻하지 않은 성공과 통찰을 안겨줍니다.
그럴듯하게 어지럽혀놓은 생각의 만찬보다
잠깐 사이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이 더 가치있는 순간이 있고요.
지하철 노선도를 들이미는 것보다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머리 지도를 순간적으로 번쩍 열어보는 것이 신상을 지켜냅니다.
뇌의 생존 신호와, 잘 축적된 짬이 섞이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가상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모멸감은 잠시 버텨야겠지요.
하지만 보통의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머리에 밀어넣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풀리지 않는 골치 아픈 무언가가 있다면
숨 한번 돌리고 '찰나' 해보세요!
마법이 일어날 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