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

[회고의 서재] 모른 체 살아서, 너무 죄송합니다.

by 제이손

조심스럽게 잡아 닫는 현관의 손잡이. 무심하지 않은 조용함.

각자의 할 일이 이것저것 분주하지만, 섞이지는 않는다.


절간이지만 머리가 곤두설 정도로 불편하지 않다.

모두가 잘 정리된 채로 낡아가는 중이었다.


적막이 꽤 오래 가나 싶더니 가족의 모습을 꼭 닮은 조카가 태어났다.

길기도 꽤 길었던 적막이 와장창. 나이조차 셈을 하지 못하는 때에는 포대기에 싸여

사정없이 울음을 터트리더니, 제 나이에 숫자가 붙자마자 두 발을 사정없이 구르며 사고를 친다.


절간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전쟁터이다.

그런데 작은 사고뭉치의 난장에, 낡아가던 가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를 되찾았다.


누가 먼저일지라도 고사리 손인사를 받고 싶어 대문 손잡이를 박차고 들어온다.

침대요에서 텔레비전만 보던 할머니는 포대기를 매고 밥풀을 묻힌 채 뛰어다니고,

바둑과 소주 한 병이 전부인 할아버지는 요술봉을 들고 거실을 서성인다.

논문 준비에 잠만 겨우 청하며 시니컬해진 나도 어느새 유모차를 밀며 흥얼대는 장난감 동요.


얼굴과 김치 그릇에 양배추를 뒤집어써도,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어 쏟아도

그 누가 눈썹 하나, 주름 하나 찡그리지 않는다.

할머니 이마를 맞대고 배시시, 이틀 낮밤은 할머니 매무새까지도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어른 주먹만 한 머리를 벽에 찧고 엉엉 우는 순간이면 다들 준비한 마냥 한 목으로 곡소리.


사나흘의 전쟁통이 끝나고 자기 엄마 품에 이끌려 이번엔 작별의 고사리 인사.

집은 다시 남양주 불암사. 놀라울치만큼 다시 정리되었고, 고요하다.


고요함은 다시 생각이 쌓이는 시간.

내 새파란 날도 저렇게 똑같이 사랑받았구나. 조카를 보며 느껴지는 행복하지만 복잡한 감정.

내겐 기억조차 없지만, 나를 사랑으로 키우던 부모님의 모습이 저 작은 얼굴에 일렁인다.


제 바쁘다고, 외간 여자한테 믿음 준다고, 친구와 직장 동료들과 술 한잔에 웃음 피운다고

주머니까지 털어대며 집을 절간으로 만들어놓고

부모님이 낡아가는 것도 모른 체, 아니 아랑곳하지도 않았으면서

막상 부모의 사랑을 눈으로 보며 부러움을 느끼는 이기적인 내 모습.


다시금 피부로 느껴지는 부모의 새로운 자식 앓이를 보며

조건 없이 주는 진정한 사랑이, 그리고 낡아가는 부모님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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