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일기장] 과연 우리는 ‘잘’ 죽을 수 있을까?
얼굴 몇 번도, 명절에 인사도 제대로 못 올렸던 외할머니.
그리고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보.
아버지 손에 이끌려 향한 곳은 구불진 산골을 들어가 몇십 분 건물.
호스를 가득 몸에 채우고 가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만 겨우 뜨고 손가락의 움직임조차 버거우셨던 그분.
더는 메말라 이제는 스러져가는 엄마의 비명 울음.
교회에 다니셨던 그분을 위한 기도문이 누군가의 울음통과 섞이는 와중에
너무나도 이상하리만큼 환한 웃음을 잊지 않으셨던 간호사 선생님.
내 인생 '호스피스'의 첫 기억입니다.
몸조차 가누지 못했던 할머님이 눈에 가끔씩 일렁일 때마다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합니다.
'미련 없이 아름답게 갈 것인가?'
'고통 속에 조금 더 남을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면, 아마도 전자가 더욱 숭고해 보입니다.
멋진 죽음, 아름다운 죽음, 숭고한 죽음.
최근 웰 다잉(Well-Dying)은 이러한 품위를 주장하며
누구든지 존엄하게 ‘잘 죽을’ 권리가 있다고 강력한 목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웰 다잉은 아직까지도 떠나는 자의 존엄과 선택을 주로 말할 뿐,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나 현실의 무게에는 조금 소홀해 보입니다.
가족 간병인은 '보이지 않는 제2의 환자'라고 불리웁니다.
치매환자 보호자 및 간병인 설문 결과, 32%가 최근 1년간 극단적 선택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응답합니다.
나의 말로를 내가 결정할 수 없는 현실은 더욱 무섭습니다.
실제로 노인 연명치료 거부는 본인의 의사보다 가족의 의사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현실의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부담'.
내가 바라는 종착역보다, 종착역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할 가족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나아가 송병기의 '각자도사 사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이 좋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도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해결해야 할 길은 아직 멀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잠시도 웃음을 잃지 않던 호스피스 간호사 선생님과 목사님도 떠오르고요.
사람 눈보다도 훨씬 낮은 화소의 모니터 속 할머니 사진을 닳아라 매만지며
가족이 깰세라 새벽녘을 눈물바람으로 조용히 적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엄마의 엄마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한 연습 중이었겠지요.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아있지만
떠나는 사람도, 떠난 자리를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점점 더 아름다운 선택이 가능한 날이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약업신문, 2019. 07, “노인 연명의료중단 ‘스스로’ 아닌 ‘가족’결정 더 많아”
하이닥, 2022. 10. 내일은 ‘호스피스의 날’, 간병인 정신적·정서적 고통에 노출되기 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