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예찬하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혼자서도 인생이 충만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고독한 것이라고, 모든 것을 혼자서 해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드물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입사한 지도 만 3개월이 되어 간다. 애초에 직장에서의 일 자체가 반드시 누군가와 협업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직장생활에서의 불안, 초조함, 스트레스를 혼자서 견딘다는 것을 이제는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도대체 부모님은 어떻게 직장생활을 30년 넘게 하셨을까.
현재 직장생활에서 일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나, 관계로 인해 오는 스트레스가 객관적으로 많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내가 뿌듯함을 느끼며 퇴근하는 날보다는, '오늘 하루도 버텼다.'라고 생각하며 퇴근하는 날이 더 많다. 그렇게 5일을 버티면 마침내 주말이 오고, (주말 출근을 해야 할 만큼 일이 많지 않는 상황이라면) 비로소 자유를 즐길 수 있다. 오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그 미묘한 불안감이 사람을 때로는 설레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언가 일을 하고 글을 쓰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진정으로 성장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이키 슬로건처럼, 일단 그냥 하고 있다.
다행히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평판이라는 것은 변화무쌍하기 마련이라, 내가 일을 한두 번 '펑크' 내거나 의도치 않게 무례한 행동을 몇 번 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평판이란 바뀔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친구는 만들지 못해도 적어도 적은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내 의지대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서 어떻게 해야 적을 안 만들 수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은 일만 잘 하면 장땡이라는데 내가 일을 잘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일을 잘 하는 것인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일을 잘 할 생각은 없고 평균만 가는 게 목표이다. 적당히 빠른 속도로 적당한 퀄리티의 결과물을 산출해 내고 싶다.
아무튼 쳇바퀴같은 회사생활을 견뎌내다 보면 평일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다. 다시 한 번, 부모님 이모 삼촌 고모 숙모들이 어떻게 이러한 생활을 30년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어찌어찌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점 역시 마찬가지로 느낀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들과 양평의 한 정원에 다녀왔다. 비록 토요일 오전이라 서울에서 양평으로 가는 길은 엄청나게 막혔고, 돌아오는 길 역시 교통체증이 심했다. 차만 5시간 가까이 탔지만, 그럼에도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이 금방 갔다. 심지어 운전하는 친구가 제일 말이 많았다.
가격대가 다소 높은 정원이여서 조금은 걱정했다. 뽕을 뽑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의외로 괜찮은 곳이었고, 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비싼 가격 탓인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고즈넉하고 산책하기 좋았다. 날씨도 좋았고, 단풍이 물든 계절이라 풍경도 예뻤다. 무엇보다도 자연 속에서 풀향기를 맡으며 걷는 그 순간에서 여유와 즐거움을 느꼈다. 친한 친구들과 실없는 얘기를 하면서, 가끔 사진도 찍고,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는 그 순간만큼은 일 스트레스도, 다이어트 스트레스도, 재테크에 대한 스트레스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너무 미화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만큼 자연이 주는 안정감이 컸던 것 같다.
물론 정원이란 무릇 인공적인 자연이다. 실제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하게 정돈된 자연이다.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간 자연이다. 그래서 더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돈이 많다면 매주 와도 좋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공간도 좋았지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좋아서 그 공간에 대해 좋은 추억이 남게 된 걸지도 모른다. 최근 내가 기댈 수 있고 또 내게 기대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나의 힘든 점들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친구들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 주는 자체가 위안이 된다.
이 순간을 혼자서 견디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위안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요즈음에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딱 2~3년만 서울에서 일하고 고향 대구로 돌아가자. 집값도 저렴하고, 사람도 적고, 교통체증도 덜 심하고, 서울보다는 모든 게 여유로운 대구로 가자. 대구에 가면 월급이 좀 적겠지만 삶은 조금 더 여유로울 것이고, 내 집을 마련하기도 더 편할 것이고, 고향 친구들과도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겠지. 잘 풀리면 내 사무실을 차릴 수도 있겠지. 많은 돈은 벌지 못해도 내가 나름대로 사업을 꾸려 나가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겠지.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2년 뒤엔 대구로 갈 거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서울을 떠나고 대구로 돌아가면 마치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마냥 말한다. 사실 대구가 유토피아도 아니고 율도국도 아니라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이 지치고 힘든 인생을 어떻게 견디랴. 실없는 소리라 할지라도 계속 말하다 보면 언젠가 말하는 대로 소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대구라는 율도국에서 소박하지만 평온한 사회를 이루어 낼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곳에서 나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서로의 삶에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
예전에는 밑도 끝도 없는 위로 에세이들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해도 괜찮아' 류(類)의 에세이들이 사회문제의 구조적 측면을 가린다는 생각만 했다. 마치 진통제처럼 잠깐의 고통을 잊게 해줄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나쁜 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책이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요즘 무엇이든 괜찮다는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글을 썼을까? 어쩌면 무엇이든 괜찮지 않다는 글을 쓰지는 않았을까. 무엇이든 불편하게 느껴야 한다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 환경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바꾸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대구는 전혀 율도국이 아니다. 대구가 율도국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지금 당장 10개 넘게 댈 수 있다. 그럼에도 내게 대구가 없다면, 율도국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견딜까. 좋은 친구들 덕분에 그럭저럭 견딜 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의 전환점이 있기를 원한다.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한 번에 싹 날려 버릴 획기적인 무언가가 나오기를 바란다.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삶을 살 수 있는 그곳. 사실 그곳이 대구든, 광주든, 울릉도든 상관 있으랴. 하지만 일단 내 고향 대구를 지금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율도국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