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지,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지에 대한 질문을 듣는다. 솔직히 말하면 쉽게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저 행복했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면 최근 있었던 몇 가지 일을 얘기하면 되겠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인지는 헤아리기가 어렵다. 어찌 보면 내가 누누이 말하듯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면 어떻게 보면 행복을 느끼는 뇌의 어느 부분이 잘 활성화되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뻐서 엄청난 흥분을 느끼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평생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보통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로스쿨에 합격했을 때, 혹은 변호사시험에 합격했을 때가 그럴 때가 아닌지 되묻고는 한다. 물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혼자 있는 집에서 환호성을 지를 만큼 감정의 격동을 느끼기는 하였다. 어떻게 보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유력한 후보인 셈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안도감도 컸던 것 같다. 당시 연세대, 고려대 수시전형에서는 1차합격조차 하지 못했고, 정시로는 내가 원하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광탈'할 것 같은 성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 때가 그나마 '희열'이라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긴 했다.
하지만 로스쿨 합격, 변호사시험 합격 때에는 기쁨이나 행복이 그리 크지 않았다. 로스쿨에 합격했을 때에는 최초 합격자 발표과정에서 추가합격이 유력한 예비번호를 받았는데, 사실 김이 조금 빠졌다. 어쨌거나 명목상으로는 불합격인데, 추가합격이 유력하긴 한데 이걸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1차 추가합격 발표 때 당연히 추가합격이 되긴 했는데, 그 때는 이미 추가합격이 될 걸 90% 이상 확신하던 때였어서, 당연한 순리되로 되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1차 추가합격 발표 직전에 내가 가장 친애하는 고등학교 친구와 2시간 동안 목욕탕에서 목욕하며 떠든 게 내겐 더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시간을 보내는 게 시험의 합격보다 더 소중한 행복의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들이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하기에는 그 희열이나 행복의 정도가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섣부르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말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변호사시험 합격발표날에도 합격의 기쁨이나 희열보다는, 불합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더 크게 느꼈다. 1년의 수험생활을 더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에 대해서 로스쿨 3학년 때에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합격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너무 크기도 했다.
오히려, 변호사시험 5일 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당일에 시험을 마치고 곧바로 대학 동기의 자취방에 가서 4명이서 치맥을 한 게 더 기억에 남고, 어떻게 보면 더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선택형의 경우 곧바로 정답이 올라오기 때문에 선택형 시험지를 친구네 자취방에서 같이 채점했는데, 다행히도 예상한 범위 내인데다가 합격 유력권인 결과가 나와서 매우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시험은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시덥잖은 얘기를 하면서, 어쨌든 결과와 무관하게 시험이 끝났다는 기쁨을 나누었다. 그 친구들과는 여러모로 정도 많고, 기분 상한 적도 많지만, 어쨌거나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들이다.
군에서도 임관이나 전역의 순간보다는 다른 순간들이 더 행복했던 것 같다. 놀랍게도 훈련소에서는 주말에 휴대폰 사용이 가능했는데, 같은 생활관을 쓰는 후보생 5명이서 당시 유행하던 <어몽어스> 게임을 함께 하면서 웃고 떠들었던 순간, 그리고 딱 한 번의 읍내로의 외출을 하며 소고기를 구워먹고, 코인노래방에 갔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전역의 순간은 어떻게 보면 헛헛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생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반면, 마지막 3년차 복무 중 어느 날, 법무실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 5명이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부대에 복귀하면서 한 차에 타서 커피를 들고 웃고 떠들던 그 순간이 가장 행복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물론 2년 동안 송무장교를 하면서 업무적으로 짜릿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나름대로 중요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사건, 혹은 패소를 예상했던 사건에서 승소한 경우에는 굉장히 짜릿함과 기쁨을 느꼈다. 특히 징계처분이나 보직해임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사건의 경우, 구두변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구두변론이 이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용과 기각의 결론이 나오는데, 집행정지 사건에서 열심히 구두변론을 한 이후에 집행정지 기각결정(피신청인의 입장에서는 승소)이 나오면, 이번에도 한 건 해냈다는 성취감이 크게 느껴졌다.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한 부동산 관련 소송 1심에서 승소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의 기쁨을 느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혹은 업무 과정 속에서의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이 때때로 지나갔지만, 그래서 그 다양한 순간 속에서 어느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냐고 물으면 마땅히 답을 하기가 어렵다. 오랜 기간 지속되는 여운을 남길 만큼 크게 행복했던 적은 별로 없다. 그나마 굳이 따진다면 서울대학교 합격발표의 순간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그 때도 행복과 더불어 재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더 컸기에, 행복의 순간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서도 딱 잘라서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는 늘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격언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교에서 입시와 수능을 준비할 때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매번 시험을 치를 때마다 전교 1등을 하고, 내신에서도 1등급만 받으니까, 매번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고3 7월 모의고사에서는 만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매월 모의고사, 분기마다 있는 중간/기말고사에서 매번 나의 우수함(?)을 증명할 수 있었고, 내가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차라리 행복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한편으로, 로스쿨을 준비할 때는 조금 힘들긴 하였다. 하지만 리트 자체가 지능시험에 가까워서 내가 크게 준비할 것이 많지 않았고, 그저 기출문제를 풀면서 시험운이 좋기만을 기도하였다.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는 로스쿨 3년의 과정도 힘들었다. 이때는 매일같이 부모님께 전화해서 힘들다고 징징대던 시기였다. 오죽했으면 엄마도 내 징징댐을 받아주다가 지쳐서, '이제는 아빠한테 전화해라'라고 말하기도 하셨다. 그러다가 아빠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외삼촌에게 전화한 적도 있었다(다만 외삼촌이 내 얘기를 듣기보다는 복싱을 하며 배운 인생철학 얘기만 2시간 동안 해서 외삼촌에게는 딱 1번만 전화했다). 아무튼 힘든 시기였고, 학점도 정말이지 낮게 나왔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내가 해야 할 것이 굉장히 명확했고, 로스쿨 동기들과는 친하지 않았지만 그 바깥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합격하고 나서 과거가 미화된 것일수도 있는데, 그 때 나름대로 놀러도 많이 다니고, 친구들과 맛집과 인스타 감성 카페 탐방도 정말 많이 했다. 변호사시험 1달 전까지 빨간 어플이랑 분홍 어플로 사람을 만나고 다녔으니 말 다 했다. 심지어 친구들이 '너 이제 시험까지 1달 만났는데 이렇게 친구들 만나러 다녀도 돼?'라고 물을 정도였다. 수험생활의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떠들어서 해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름대로 잘 놀면서(?) 수험생활을 보냈어서 그런지, 과거가 미화되어서 그런지, 그 때도 죽을 만큼 힘들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군에서도 훈련소 초반엔 잠깐 힘들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생활했다.
굳이 따지자면 전역한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굴곡진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군에서 전역한 순간부터 이 사회가 준비한 에스컬레이터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이제 사회적으로 정해진 '루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커리어를 쌓아 나갈 것인지,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 것인지가 완전히 내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첫 선택을 그리 잘 해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친구가 말했듯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휴직을 하고, 이제 1주일 뒤에는 회사로 복귀해야 한다. 휴직 전보다는 좀 더 자신감이 생기기는 했지만, 잘 할 수 있을지?
차라리 누가 내가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정해주면 좋겠다, 회사도 군대처럼 의무복무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성인이라면 마땅히 노예의 삶이 아니라 주인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좋은 길인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고, 좋은 길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여 꼭 좋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인지, 불가피하게 다른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평가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후회를 떨쳐내야 할 것인지, 혹은 그러한 미련과 후회도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어려운 문제이다. 앞으로 후회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어쩌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인생의 1/3정도 살았고, 이제서야 서막이 끝나고 본론이 슬슬 시작되었을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지금이 가장 힘든 시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마찬가지로 가장 힘든 순간도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예상할 수 없으니,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다만 그때그때 임기응변만으로 현재를 살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애매모호한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현재에 충실히 살면서, 그 현재의 나침반이 될 '가치'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추상적으로는 있지만, 조금 더 구체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