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법무관 시절의 이야기이다. 모 부대의 시설 공사와 관련하여 특정 업체(이하 'A업체'라고 한다)와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가 지연되자 A업체에서 공사계약의 해제를 요청하였다. 부대 측에서도 A업체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사계약을 해제하기로 하였다. 이후 부대에서는 A업체에 이미 지급한 공사대금에 대한 반환을 요청하였는데, A업체에서는 일부분만 반환할 뿐 나머지 수천만 원에 대한 반환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실무부서에서 소송 제기를 요청하여 소장을 작성하여 국가가 원고로서 A업체에 대해 부당이득반환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원고로 소송을 수행한 몇 안 되는 경우였다.
피고인 A업체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대응에 나섰다. 답변서를 통해서 자신들이 공사계약을 계속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부대 측 과실에 의한 것이므로, 자신들이 수천만 원을 반환하지 않은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대표이사 개인이 답변서를 작성하다 보니, 법적으로 무의미하거나 엄밀하지 못한 주장들이 반복되었다. 가령 부대 측 과실로 계약을 해제하는 것이므로, 계약금 상당액은 자신들이 가져도 된다는 주장을 했는데, 계약서상 해약금에 대한 규정은 전혀 없었다. A업체가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원고인 대한민국이 승소할 가능성이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피고인 A업체의 법적으로 무의미하거나 유해한 주장이 이어지고, 그에 대해서 법조인인 나의 원론적인 답변으로 서면공방이 이어지던 와중, 제1회 변론기일이 열렸다. 그런데 재판장은 대뜸 원고 대리인인 나를 향해서, 자기가 보았을 때는 아직까지 증명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고, 이대로라면 원고가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증명이 미비한 부분 몇 부분을 지적하여 주셨다.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2년 동안 송무장교를 하면서 재판장이 대놓고 '이대로라면 원고 패소이다.'라는 식으로 심증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명이 미비한 부분을 지적해주셔서, 약간의 힌트를 주셨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판사님의 피고를 향한 태도는 더 가관이었다. 판사님께서 '웬만하면 이런 얘기 잘 안하는데, 변호인이 선임되어 있지 않으니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피고 측에 대놓고 대응 방안을 알려주셨다. 가령, 피고 측은 원고의 이행거절을 이유로 원고를 상대로 계약 해제를 주장할 수 있고, 계약해제를 하고 나서 피고는 원고에 대해 상계를 주장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이 사건 공사계약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순이익을 손해액으로 특정해서 상계를 주장할 수 있다고, 변론 방향을 제시하였다. 황당했다. 판사가 간접적으로 힌트를 주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마치 피고의 변호사인양 변론 방향을 제시하다니. 너무 편향적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어찌 보면 우리 측에도 힌트를 주기는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판사님의 면전에서 이러한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판사님께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피고에게 편향적인 발언을 하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이의제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특정 부분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니 더 증명해 오라고 소극적으로 힌트를 주는 것과, 적극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추가 주장을 하면 당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대응 방안을 알려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개입이였다. 그 자리에서 직접 문제제기를 하여도 괜찮은 문제였던 것 같다. 변호사 안 선임한 게 벼슬인가?
우리 민사소송법에는 '변론주의'라는 원칙이 있다. 변론주의란, 소송자료(사실 및 증거)의 수집·제출 책임을 당사자에게 맡기고, 법원은 당사자가 제출한 소송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민사소송의 대원칙이다. 따라서 당사자가 주장하거나 증거로 제출하지 않은 사실은 판결의 근거가 되지 않으며, 법원은 이를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다. 쉽게 말해, 법원은 당사자가 주장하고 증명한 사실관계만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려야 하고, 당사자가 주장, 증명하지 않은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특히 법원이 적극적으로 당사자들의 변론에 개입하여 특정 편의 공격방어방법을 제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재판장이 피고 측에게 특정한 공격방어방법을 제안하는 것은, 오직 당사자들이 주장, 증명한 사실만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변론주의 원칙에 대단히 위반되는 것이다. 대법원 역시 "당사자가 주장하지도 아니한 법률효과에 관한 요건사실이나 독립된 공격방어 방법을 시사하여 그 제출을 권유함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변론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석명권 행사의 한계를 일탈하는 것이 된다."라고 판시(대법원 1996. 2. 9. 선고 95다27998 판결 등)하여 재판부의 이러한 행위가 위법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재판이 끝나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냥 넘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자리에서 바로 이의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준비서면을 통해서라도 재판부의 편향된 소송 진행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다음 변론기일은 내가 아니라 내 후임자가 출석할 것이기 때문에. 후임자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재판부에 쓴소리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준비서면에 피고 측의 논리에 반박하는 우리의 주장을 담고, 재판부에서 미비하다고 지적한 사항에 대한 주장을 보강한 다음에, '적극적 석명권 행사의 자제를 요청합니다.'라는 소제목을 달고, 그 이하에 바로 위 문단에 있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나는 '피고가 계약해제나 상계 주장을 전혀 하지 않는 가운데 재판부에서 계약해제나 상계 주장을 권유하는 것은 변론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것으로 석명권 행사의 한계를 일탈하는 것입니다.'라고 기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후 본 사건 진행 과정에서 재판부에서 변론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적극적 석명권 행사를 하지 않기를 정중히 요청합니다. 만약 재판부에서 반복적으로 적극적 석명권을 행사한다면, 피고는 민사소송법 제159조 제1항에 따른 변론의 녹음 또는 속기를 신청하고자 합니다.'라고 기재하면서 해당 소목차를 마무리하였다. 사실 일반 로펌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준비서면은 나갈 수 없다. 이례적이다.
하지만 나는 국가 소송수행자였고, 우리 부서장은 내가 소송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고, 개별 서면에 대해 컨펌하지도 않았고, 마침 나는 전역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재판부를 '들이박는' 내용의 서면을 작성해서 제출까지 할 수 있었다. 이 서면을 제출하고 일주일 뒤에 나는 전역하였고, 이후 재판 진행상황을 보니, 재판부가 피고인 A업체에 '소송구조 신청(형사소송의 국선변호인과 유사한 제도)'을 권유하여 A업체가 소송구조 신청을 하고, 결국 소송구조를 통해 A업체는 민간 변호사를 선임하였다. A업체 대표이사 혼자서는 도저히 법조인을 상대로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사실, 변호사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재판부가 변론주의 원칙을 위반하여 이른바 '나홀로 소송'을 수행 중인 당사자들에게 대놓고 힌트를 주거나 공격방어방법을 제안하는 행태에 대한 문제제기가 굉장히 많았다. 물론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은 당사자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법적으로 무의미한 주장을 하거나 오히려 유해한 주장을 하는 등, 변호인이 선임된 당사자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재판부에서는 변호인의 선임을 권유하거나, 위 사안처럼 소송구조 신청을 권유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변론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당사자가 주장, 증명한 사실만을 바탕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아 제대로 된 법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나홀로 소송 당사자들이 인간적으로 안타까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판사 개인의 안타까움 때문에 민사소송법상의 대원칙인 변론주의를 위배하면서까지 판사가 특정 당사자에게 편향된 재판 진행을 하는 것이 용납될 수는 없다. 원칙은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변론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변호인을 선임하도록 권유하거나, 변호인을 선임할 여력이 없다면 소송구조 신청을 권유하면 되는 일이다. 왜 판사가 특정 당사자의 개인 변호인처럼 변론 방향을 제안하는지 나로써는 알 수 없다.
판사들이 변론주의 원칙을 위배하는 행위는 특정 재판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법부 전체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굳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도 판사님께서 공격방어방법에 대해 제안을 해 준다면 누가 변호사를 선임할 것인가. 특히 특정 한 쪽만 변호인이 선임되어 있는 경우에 판사가 변론주의를 위반하는 일이 더 잦은 것 같다. 판사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재판에서 단지 변호인이 선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질 수밖에 없다면 나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원칙대로 해야 한다. 법에 규정된 원칙에 자의적으로 예외를 도입할 수는 없다.
앞으로 많은 판사들이 변론주의 원칙을 엄격히 견지하여 나가기를 바란다. 변호사로서는 판사들이 변론주의 원칙을 위반하여 특정한 당사자에게 편향적인 재판 진행을 하면, 특히 나홀로 소송 중인 당사자에게 그러한 편파적인 진행을 하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판사는 자원봉사자도 아니라 중립적이어야 한다. 앞으로는 내가 로펌에 소속되어 있어서 그때처럼 판사에게 대놓고 변론주의 위반을 지적하는 서면을 제출할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구두로라도 적극적으로 이의제기를 할 생각이다. 개별 판사의 그릇된 행동 하나로부터 사법부 전체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