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최근 은퇴선언을 한 그 배우의 일을 거론하는 것이 나답지 않게 느껴지지만, 주변 친구들 몇몇이 관련하여 내 생각을 물어보았기에 글로써 기록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이슈에 대해 논할 때는 항상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을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타인이 생각하는 좋고 나쁨에 대해서는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 배우의 과거사를 근거로 그 배우를 싫어하는 것, 혹은 그 배우의 과거사에도 불구하고 그 배우를 여전히 좋아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에 해당한다. 일단 그 배우의 이슈와 관련하여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배우의 과거 전과를 이유로 그 배우에 크게 실망한 듯하다. 어쩔 수 없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배우, 그리고 모든 연예인은 대중의 사랑에 근거하여 활동하고 있다. 많은 수의 사람이 그 배우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중예술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해당 배우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거나 적극적으로 싫어하는 의사를 내비친 이상, 그 배우는 더이상 대중예술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에 출연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대중이 그를 비토하는 이상 그는 대중영화에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오래 전의 전과를 현재 특정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한 옳고 그름과는 별개의 문제, 즉 좋고 나쁨에 대한 문제이다.
그 배우가 은퇴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대중들의 정서를 고려한 배우 본인의 선택이다. 이에 대하여 타인이 '은퇴를 번복하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대중의 사랑을 잃어버린 대중예술인은, 은퇴를 선언하기 이전에 이미 대중으로부터 은퇴를 '당한' 것이고, 은퇴 선언은 이를 확인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한다는 것은, 그가 대중의 사랑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그 배우에 대해 싫어하는 감정을 내뱉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좋고 나쁨의 감정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다.
좋고 나쁨의 문제와 옳고 그름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래 전의 전과를 현재 특정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라는 명제는 윤리학, 법학에 의하여 충분히 토론할 수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전의 전과를 근거로 특정인을 싫어한다.'는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동성애자가 동성을 좋아하는 것이, 혹은 이성애자가 동성을 성애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어떤 대상에 대해 좋고 싫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을 수도, 좋을 수도 있다.
당위와 현실은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의 전과를 '현재' 특정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그 배우가 배우로써 아무렇지 않게 계속 활동한다면 어딘가 꺼림직함이 느껴질 것 같다. 뭐랄까, 대중예술인이 대중의 시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리 좋은 시선을 보낼 것 같지 않다. 아무튼, 우리가 그 은퇴를 선언한 배우에 대해 논쟁을 한다면, 그 배우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배우의 과거 전과를 이유로 그 배우에게 현재 불이익을 가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이는 어쩌면 윤리학과 법학의 아주 오래된 논쟁 소재일지도 모른다.
형법학의 전통적인 두 갈래로 '응보주의'와 '교화주의'가 있다. 응보주의란 형법은 범죄에 대한 응보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며 형벌을 통해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중시하는 흐름이다. 반대로 교화주의는 형법은 범죄자를 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규범이라 전제하며, 형벌을 통해서 범죄자가 다시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고 사회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것을 중시하는 흐름이다. 근대 형법은 교화주의를 이념적 근거로 하고 있다. 신의 섭리를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중세와 달리 근대는 인간의 이성을 판단의 근거로 삼았고, 인간은 이성에 따라 판단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윤리학에서도 노력을 통해 인간이 도덕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존재인지, 혹은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지에 대해 수많은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논쟁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은 누구나 노력한다면 도덕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많은 종교인들과 윤리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기독교 윤리에서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으나 신앙을 통하여 죄를 씻어내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 점, 불교에서 모든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점, 유학에서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일맥상통한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인류는 인간이 환골탈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이 환골탈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실 썩 단순하지 않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나뉘어 있다고 믿는 것은 간편하다. 그러나 인간은 노력에 따라 악인도 선인도 될 수 있고, 선인이 악인이, 악인이 선인으로 변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꽤나 높은 수준의 지적 작용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은 세상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요구한다. 누구를 믿을 것인지, 누구를 믿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번 악인이면 영원히 악인이고, 한 번 선인이면 영원히 선인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누구나 극기복례하면(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악인이 노력을 통해 선인이 될 가능성을 믿었고, 이러한 이념을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런데 요즈음 그 배우에 대한 뭇 사람들의 도덕관념을 보면, 어째 조선시대 조상님들의 도덕관념보다 퇴화하는 것 같다. 악인이 끝까지 악인으로 남아야 한다면, 누가 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는가. 한 번 전과가 생기면 영원히 비정상인이라는 낙인이 찍힌다면, 단 한 번의 실수로 우리 사회의 안전망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 사회의 범죄는 늘어날 것인가 줄어들 것인가.
수십 년 전의 일탈행위가 현재까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다만, 그 배우에 대한 이슈에서 사람들이 분노하는 점은 단순히 수십 년 전의 범죄이력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그 이력을 숨겨왔다는 점에도 있는 것 같다. 그 배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지점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연예인이 본인의 전과이력을 누가 묻기 이전에 스스로 말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고, 도덕적 의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쟁의 소지가 있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악인에게 낙인을 찍기보다는, 악인이 선인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 배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쟁이, 단순히 그 사람에 대한 좋고 싫음의 감정 표출을 넘어서, 과거의 잘못을 근거로 현재 그 사람을 재단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건설적인 논쟁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최근 진보당에서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에서도 전과를 근거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길 바란다. 다만, 그 배우에 대해 대중이 좋고 나쁨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마치 설교하듯이 발언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당신의 의도와 다르게 당신도 '대중을 개, 돼지로 아는 악인'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