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가 유독 길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2025년은 전역의 해였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해였다. 7월 31일에 전역신고를 하자마자, 8월 1일에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해야만 했다. 군인에서 변호사로, 완전히 신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12월 31일까지 5개월이 지났지만, 사실 중간에 4주 질병휴직을 하는 바람에 사실상은 로펌 생활 4개월차가 되었다. 그런데 체감상으로는 4개월이 아니라 6개월도 넘게 지난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언제 군에 있었는지도 까마득하게 느껴질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간 듯하다. 실제로 많은 일이 있기도 했고, 그만큼 생활상의 변화도 컸기 때문일 테다.
솔직히 말하면 힘든 5개월을 보냈다. 적응하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다. 다행히 중간에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4주를 쉬게 되면서 한 박자 쉬고 갈 틈이 생겨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지하게 이직을 고민하거나, 혹은 실제로 퇴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을 몇 가지 꼽자면, (1) 낯선 업무, 어려운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2) 윗사람(파트너변호사)를 대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다른 로펌과 다르게 진상 의뢰인이 많지 않아, 의뢰인 대하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는 점은 다행이다. 기업 고객이 많기도 하고.
사실 로스쿨생 입장에서는 큰 로펌에 가면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회사의 경우, 듣기로는 매년 공채로 들어오는 변호사들은 2월 말~3월 초쯤에 1주 정도 교육기간이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교육기간에 찍은 동영상을 회사 공용 클라우드에 올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8월에 입사했을 때, 그 영상을 봐야 할까요?라고 물으니,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 굳이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하더라. 어차피 일을 해 봐야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일을 실제로 해 보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른 변호사님들이 기존에 쓴 서면들을 보면서 배우는 게 많은 것 같다.
로펌에서 가장 처음에 당황스러웠던 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도 일단 일을 시킨다는 점이었다. 가령, 로스쿨에서 배우지 않았던 도산법, 세법, 지적재산권법, 심지어 미국법까지 리서치만 시키는 게 아니라, 서면 또는 의견서 작성까지도 시킨다. 변호사님 저 이 분야 모르는데요?라는 말은 할 수 없다. 변호사니까, 전문가니까, 일단 해야 한다. 다행히 요즘은 엘박스AI나 슈퍼로이어 같은 법률AI들이 판례 리서치에서는 큰 도움을 준다. 방대한 하급심 판례들을 기반으로 답을 주기 때문에 하급심 판례까지도 찾을 수 있고, 때로는 내가 놓친 쟁점들까지 쟁점이 될 수 있다고 알려 준다. 이거 없었을 때는 업무를 어떻게 했을까 싶다.
어느 날 파트너 변호사님이 '이 유언장이 텍사스주 상속법에 따라 쓰인 것인지 알아봐 주세요'라고 말하며 pdf파일만 하나 보낸 적이 있었다. 영어에 잼병이라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퍼플렉시티AI에게 일단 텍사스주의 상속법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니 곧바로 알려주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해당 유언장은 텍사스주 상속법에 따라 쓰여진 게 맞는다는 것을 알기까지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만, AI의 도움을 받아도 어려운 분야들이 있다. 회생/파산법처럼 특유의 절차가 있는 분야의 경우에, 법리에 대해서는 AI에게 물어보면 알려주지만 절차적인 부분은 AI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점은 결국 해 봐야 아는 것이다.
로펌에 들어가면 골방에 틀어박혀서 맨날 서면이나 의견서만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서면이나 의견서를 쓰는 것 외의 업무도 꽤 많았다. 가령, 유류분 사건의 경우에는 피상속인이 어떤 재산을 증여받았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수십 년 전에 증여받은 재산의 경우에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변호사는 어떻게 수십 년 전의 증여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지 그 방법(예: 사실조회신청 등)까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부동산 사건 중에서도 이른바 '조상 땅 찾기' 사건의 경우 100여 년 전의 땅주인의 상속인들을 일일이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족보도 뒤지고, 100여 년 전 제적등본도 옥편을 찾아보며 뒤져봐야 한다.
이런 것들은 로스쿨에서 배우지 않는 업무이다. 로스쿨에서는 판례의 법리나 가르치지, 실제 실무에서 쓰이는 사실조회신청 방법이라든지, 피고의 전화번호만 알고 주소를 모를 때 어떻게 주소를 알 수 있는지라든가, 유류분 사건에서 특별수익을 어떻게 하나하나 찾을 수 있는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법률AI도 법리에는 빠삭하지만, 실제 실무상 필요한 절차적 부분은 잘 모른다. 그렇다고 이걸 법인에서 1주일 정도 되는 신입 교육 프로그램에서 일일이 가르쳐줄 수도 없다. 워낙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니까. 결국에는 동료 어쏘변호사 또는 파트너변호사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 팀은 파트너변호사들이 꽤 잘 가르쳐주시는 것 같다.
로펌을 흔히 파트너-어쏘 사이에서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이건 회사마다, 회사 안에서도 팀마다 경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다행히도 내가 속한 팀에서는 파트너변호사님들이 사건에 대해서 어쏘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기보다는 사건 진행의 주도권을 잡으시고, 어쏘가 쓴 서면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첨삭해주시는 편이다. 물론 파트너변호사마다 또 다르긴 한다. 어떤 분은 어쏘가 쓴 서면을 훑어 보고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그대로 나가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분은 빨간펜 대잔치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본인이 싹 다 갈아엎는 경우도 있다. 절충으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재작성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로펌은 야근이 일상화된 공간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동안 야근을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 사실, 일이 슬슬 많아져서 야근이 일상화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고 또 휴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4주간 휴직을 하다 보니, 그 사이에 원래 내게 와야 할 신건들은 다른 어쏘변호사님들에게 배당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존에 하던 사건들도 일부분 다른 변호사님들이 임시로 맡게 되었다. 12월 중순에 복직을 하였지만, 연말연시 법원 휴정기와 겹쳐서 어찌어찌 일이 별로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입사 동기는 맨날 야근이 일상이라고, 막차를 자주 놓쳐서 아예 자차로 출퇴근을 한다는데, 조금은 민망하다.
물론 휴정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일이 많아질 테다. 어차피 기일이 지정되어 있는 사건도 있고.. 지금 당장 일이 없는 것은 일시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어려운 일, 낯선 일이 많고,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AI의 도움도 조금 받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일단 부딪혀가면서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어느샌가 성장해 있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 팀 파트너변호사 중에서 성격상 '빌런'인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여전히 파트너변호사 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 또한 익숙해지지 않을까. 새해에는 회사생활에 적응하고, 무슨 사건이 배당되든 그럭저럭 '쳐낼 수 있는' 그런 변호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