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직장인들은 첫 출근하는 날부터 '퇴사'를 앵무새처럼 외치고 다닌다고들 말한다. 마음 속에 사직서 하나 품고 다니지 않는 직장인이 어디 있으랴. 작년 8월 1일에 입사하였으니 이제 겨우 만 6개월 정도 회사를 다닌 것이고, 휴직한 4주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회사생활은 5개월을 겨우 넘긴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요새 하루 일과 중 하나가 채용공고 보기이다. 그러던 중, 마침 괜찮아 보이는 공공기관 공고를 하나 발견하여 이번 주 주중에 지원서를 내버렸다. 다음 주까지가 지원기간이라 사실은 조금 더 자기소개서를 다듬고 서류들도 챙겨볼 수도 있었겠지만, 얼른 최종 지원을 하지 않으면 기회가 도망갈 것 같은 느낌에 빨리 지원해버렸다.
요즘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나 역시 요즘은 고민거리가 생길 때마다 '인간 친구'들의 조언을 구하는 동시에 'AI 친구'의 조언을 구하곤 한다. 챗지피티, 제미나이, 퍼플렉시티 3가지를 주로 쓰는데, 신기하게도 AI마다 조언하는 포인트나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 나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블로그 글을 긁어와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분석해 보라고 얘기한 다음에, 내가 이 공공기관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어떤 것 같아? 라고 물어보니, 어떤 AI는 최적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어떤 AI는 그것이 '도피'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도전'이라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지금 직장도 조건이 나쁘지는 않다. 연봉으로만 따지면 만29세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연봉을 주는 직장 중 하나를 다니고 있다. 일이 빡세지도 않다. 월 타임(순근무시간)을 100시간 넘겨본 적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팀마다 꼭 하나씩 있는 '프리라이딩 어쏘'라고도 볼 수 있다. 아직은 팀 내에서 인간관계적으로 크게 문제를 겪고 있지도 않다. 복직을 한 12월 중순부터 현재까지 야근을 한 횟수가 1주일 평균 1회 정도 되는 것 같다. 우리 회사의 업계순위를 고려하였을 때 있을 수 없는 '워라밸'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괜히 불안감이 든다. 언제 어떻게 일이 빡세질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언제 혼날지 모르기도 해서.
사실 일이야 빡세질 일만 남은 것 같기는 한데, 12월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1월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2월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법조계 최고의 바쁜 시즌인 3~4월이 되면 당연히 나 역시 바빠질 테고, 일이 너무 적어서 불안감을 느꼈다는 내 자신을 어이없어 하면서 반추해볼 것이다. 어쩌면 일이 많고 적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날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입사 첫 달부터 쭈욱 타임 140~50시간(대략 월화수목금 밤8~9시에 퇴근하는 정도의 업무강도) 이상 찍는 나날들이 지속되었고, 앞으로도 그 정도 타임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면 차라리 덜 불안할 것 같다는 느낌?
사실 업무량이야 조금씩 점진적으로 늘어난다면,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어찌어찌 적응해버릴지도 모른다(그러다가 삶아 죽지 않는다면). 하지만 나를 조금 더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팀 파트너변호사 중 한 명인 C변호사님이다. 우리 팀 파트너변호사들 대부분이 무던한 인품의 소유자라면, 그 분은 굉장히 업무적으로 까다롭고, 어쏘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높다. 그렇다고 인격모독성 발언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는데, 업무적으로 프로페셔널함을 높게 요구한다는 점만으로 같이 일할 때 부담이 크다. 그리고 이 분의 가장 큰 단점은 어쏘변호사에게 공유하지 않은 사실을 당연히 어쏘가 안다고 생각하고 일을 시킨다는 점이다.
소통과 관련하여 썩 친절하지 않은 분이고, 어쏘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일을 하기를 요구하는 면이 있어서 더욱 같이 일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 분하고 일하면서 내가 마치 '모르는 사이라서 결혼식을 가지 않았는데 왜 결혼식에 가지 않았냐고 혼나는 조세호'가 된 기분이 든 기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지금도 변론요지서를 하나 '납품'했는데, 며칠째 피드백이 오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어 굉장히 불안한 상태이다. 이미 한 번 납품했다가 한글파일에 메모만 20여개 붙어서 돌아와서 크게 뜯어고쳤는데, 또 어느 부분에서 혼이 날지 은근히 걱정스러운 상태이다. 그래도 같은 변호사인데 혼내고 혼나고 하는 것도 웃기다.
그리고 사실 우리 회사에서 하는 사건들이 나름 난이도가 있는 사건들이 많기도 하다. 생각만 하면 한숨만 나오는 사건들이 몇 건 있다. 감정신청이나 사실조회신청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어서 당장은 할 게 없는데, 회신이 오면 다시 진행을 해야 하는 사건들이 있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 것인지... 물론 이런 고민에 대해서 법조계 선배들은 '충분히 고민하면, 충분히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 동료들에게 묻고 정 안 되면 파트너변호사에게 물어봐라.'라고 말하시긴 한다. 그래도 변호사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은 있으니 시간을 좀 투자하면 뭐라도 되기는 하겠지만.. 막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니까 도피성으로 이직을 선택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솔직히 어느 정도 도피성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는다. 내가 지원한 곳은 그래도 공공기관인 만큼 워라밸이 어느 정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연봉은 반토막이 나겠지만, 조금 더 워라밸과 예측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아무래도 공공기관이고, 어쏘-파트너 개념이 없고 모두가 월급쟁이다 보니, 비록 팀장-팀원의 관계가 있더라도 어쏘-파트너처럼 수직적이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사건 난이도는 거기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워라밸이 있고 조금 더 수평적이면 내 머리도 좀 더 잘 핑핑 돌아가지 않을까.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자리에서 조금 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것의 원인이 사건이 빡세서든, 파트너가 빡세서든, 향후 업무강도가 예측불가능해서이든 간에. 어쨌든 회사에서 기가 빨리는 일은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6시에 칼퇴근을 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막상 퇴근해도 별로 유의미한 활동을 하지 못한다. 6시에 퇴근하고, 7시까지 저녁을 먹고, 8시~9시까지 운동을 하고, 집에 가서 집안일을 하거나, 혹은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그런 살고 싶다. 하지만 회사에서 기가 많이 빨려서 그런지, 운동, 집안일, 독서, 글쓰기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꽤 많다.
군법무관으로 복무할 때는 그래도 여유로웠던 것 같다. 그때도 송무를 하고 있고, 지금도 송무를 하고 있고, 사실 사무실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지금이 더 적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때도 지금도 6시무렵에 퇴근을 하는데, 어찌하여 그때는 퇴근 후에 운동, 독서를 비롯하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운동도 독서도 글쓰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인가. 삶에 여유가 많이 없어진 기분이다. 6시 칼퇴근을 해도 집에 와서 아무 의미없이 폰만 보거나 잠만 자버리니 이것이 삶인지 삶은계란인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정상화된 것처럼 내 삶에도 정상화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 공공기관에 지원하게 되었다.
연봉이 반토막나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공공기관 특성상 호봉이 쌓이면 연봉은 올라갈 거니까. 조금 더 예측가능한 삶, 윗사람과의 관계에서 덜 스트레스받는 삶, 회사에서 기빨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퇴근 후에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운동, 독서, 글쓰기 이외에 또 다른 활동을 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민변에서 조금 더 액티브하게 활동한다거나, 혹은 나만의 개인적인 프로젝트-유튜브든 블로그든 무엇이든-을 시작해본다거나. 어쩌면 친구들이나 친척,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테다. 구리 오촌조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