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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곰님 Nov 12. 2024

일단 나부터

친정에서 얻어온 짐을 푸르기 전에

1년에 한 번씩 있는 김장철이 돌아왔다. 아이를 낳고 육아와 출근을 병행하는 나에게 친정, 시댁 모두 김장 날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리고 김장을 하시더라도 꼭 평일로 잡으셔서 내가 참석하는 걸 극구 마다하셨다. 큰 아이가 지금 13살인데, 내가 시댁에서 김장을 한 건 딱 한 번이다. 그때는 시누들도 모두 모여 김장을 했는데, 아마 어머님은 그때 점심차릴라, 녁차릴라,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힘드셨는지 더 이상 같이 모여서 김장하자는 말씀을 안 하셨다.


친정집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일하는 딸이 안쓰러우신지, 엄마 당신도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도 김장을 늘 아빠와 두 분이 하신다. 오늘은 나의 휴가일자와 친정의 김장일이 우연히 맞아서 내가 자발적으로 친정에 들어갔다. 김치 양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절임배추에 빨간 양념을 묻히는 일만 하면 된다. 양도 많지 않아서 절임배추 2박스를 1시간 만에 다 했다. 그래도 양념을 계속 더하고,  절임배추를 추가로 넣어주고, 채워진 김치통을 빼고 빈 김치통을 채우는 연속되는 작업에 나는 조금 힘들었다. 렇게 김장을 마무리하고 점심을 차려먹고 서둘러 집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 엄마는 미역국과 고추절임, 생선구이 등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신다. 외손자의 하교시간에 맞춰 딸을 보내려니 엄마의 손은 더 바빠진다.


묵직해진 자동차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집으로 향한다. 나는 지하주차장에 도착해서 카트로 천천히 짐을 나른다. 식탁 가득 파와 쪽파, 무와 배추김치, 갓김치, 반찬들로 가득이다. 무는 2개만 넣으라고 했는데 씻은 무 2개, 씻지 않은 무 3개가 들어있다. 집으로 출발하기 전 봉지 봉지를 자세히 살펴볼걸 그랬다.


나보다 먼저 온 아들에게 간단히 간식을 차려주고, 식탁 가득 쌓인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짐들을 본다. 아들은 그 사이 다시 학원으로 출발한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친정으로 가야 하는 마음에 아침이 평소보다 더 다. 아침에 커피를 못 마셔서인지 몸이 피곤하다. 식탁에 쌓인 짐을 정리하면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그럼 다시 저녁 준비를 해야 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렇게 나의 하루를 보내긴 싫다.


말기 대장암 환자가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가정에 늘 소홀했던 남편에게는 전혀 미안한 게 없다고 했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쏟은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게 없다고 했다. 제일 미안한 사람은 본인 자신이라며. 항상 본인이 아닌 다른 가족을 위해 산 자신에게 죽음을 앞두고 제일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딸이 유치원 때 만든 캔버스 가방 안에 다이어리와 볼펜, 읽을 책 한 권을 주섬주섬 챙겨  집 가까운 카페로 간다. 정리되지 않는 짐을 내팽개쳐두고 집을 나선다.


'일단, 나부터 좀 쉬고 와서 정리하자!! 기다리고 있어!!'


지금 나가지 않으면 오늘 하루는 나를 혹사만 시킨 하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는 과감하게 집을 나선다.


혹자는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내 눈에 밟히는 집안일들이 너무 많다. 당장 식탁 위에 가득한 친정에서 가져온 먹거리들, 3일 넘게 빨랫대에 걸려 있는 마른 옷들, 현관문에는 우리 집 식구수의 2배가 넘는 신발들. 정리해도 다시 원상 복다. 어떤 장면이 본모습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빨래가 널려있는 거실이 원래의 모습인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3,000원

나보다 먼저 온 손님들도 시끌벅적한 동네카페. 딱 봐도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모임이다. 테이크아웃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한다. 다행히 그들은 10분 정도 더 있다가 카페를 나가고, 지금은 나 혼자 있다. 는 조금 전 정리되지 않은 짐들을 과감하게 뒤로 하고 집을 나선 나 자신이 굉장히 자랑스럽다. 이 기분을 기억해두고 싶어서 몇 자 적고 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딸이 전화를 할 것이다.


"엄마, 쉬는 날인데 왜 집에 없어? 어디 갔어?"


이제 슬슬 집에 가야 한다. 카페인 덕분인지, 휴식시간이 있어서인지 다시 기운이 난다. 그동안 방치했던 집안일을 다시 기운 내서 정리해야겠다. 김장 김치가 있는데 고기를 삶아야 하나 고민이다.


참, 아까 옆 테이블의 엄마들이 하는 이야기 중 꿀팁을 하나 알았다. 오늘부터 엽떡데이라고 한다. 평소 엽떡 먹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는 딸을 위해 할인기간 중에 엽떡 배달을 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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